연재 중 낙원 29화

29 운명 4

by 아무




광활한 숲의 경계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보다 쉬운 일은 없었다.

명주를 따라 얼마간 숲길을 걸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윤희는 지금 숲의 끝자락에 서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계가 앞을 가로막은 듯이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계 구역은 윤희에게 미지의 세계,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때문에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다소 겁이 나기도 하였다.

사방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바람 한점 불지 않는 숲은 한없이 고요했다.

윤희는 마음을 다잡고 살그머니 발을 내디뎠다.

바스락.

제 발에 짓밟혀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에 흠칫 놀란 윤희는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뻣뻣해진 목을 겨우 돌려 주위를 살피고 긴장으로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침으로 적셨다.

다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디딘 윤희는 드디어 경계 구역으로 들어섰다.

나뭇가지에 실안개가 걸쳐 있고, 멀리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윤희는 우선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대로였다.

“좋아. 당장은 아무 변화 없어.”

윤희는 조심스럽지만 너무 느리지 않게 길을 따라 걸었다.

나무 사이로 안개가 밀려든다.

몇 걸음만에 자욱하게 낀 안개가 팔다리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불안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하지만 벌써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가보자.”

윤희는 주먹을 꽉 쥐고 긴 숨을 내쉬었다.

흐린 시야 속 짧은 길만을 눈으로 붙잡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윤희의 발은 얼마 못 가 붙잡히고 말았다.

“흐익.”

차갑고 부드러운 것이 발목을 휘감고 지나가는 동시에 검고 커다란 형체가 눈앞에 나타나 그만 뒤로 넘어진 것이다.

검은 형체가 서서히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윤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귓전을 울렸다.

내민 손 옆으로 하얀빛의 형상이 새로이 나타났다.

윤희는 힘겹게 시선을 들어 눈앞의 두 형상을 확인했다.

검은 형상이 무어라 말했지만 윤희의 귀에는 여전히 심장 박동만 쿵쾅거렸다.

이담은 책이 무더기로 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그는 마치 책 속에 파묻힌 듯 보였다.

한참 동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이담이 붓을 내려놓았다

“으아아.”

이담이 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언제나 신세 지고 있는 수련에게 받아온 간식을 먹기 위해 막 의자에서 일어서던 때였다.

창틀 사이로 작은 쪽지가 날아들었다.

‘바림에 침입자가 발생했다.’

쪽지를 읽은 이담은 곧바로 그곳으로 이동했다.

쪽지는 연월에게도 날아왔다.

연월은 집 앞 꽃밭에서 차로 만들 꽃을 고르고 있었다.

한 손에 든 꽃 바구니에 살포니 얹힌 작은 쪽지를 보고 연월도 곧장 침입자가 있다는 바림으로 몸을 옮겼다.

“……으아악.”

윤희가 뒤늦게 소리 지르며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검은손에 이어 하얀빛의 형상도 손을 내밀고 다가왔다.

위협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형상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두려움이 쌓여 갈 때, 낯익은 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좀 보내.”

“아, 그렇지.”

눈앞을 가리는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개가 걷히고 윤희의 눈앞에 나타난 상반된 두 형상은 바로 이담과 연월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보구나.”

이담의 목소리가 윤희의 귀에 들어왔다.

“……아아.”

윤희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이담의 물음에 윤희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생각처럼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어쩌다 보니……. 하하하.”

윤희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아직 후들거리는 팔을 뻗어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았다.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온기에 두렵고 불안했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고 떨림도 멈추었다.

“차가 필요하겠구나.”

연월이 윤희의 손을 당기며 말했다.

“그럴 것 같네요.”

윤희가 답을 하는 순간 셋은 이미 연월의 집 주방에 와 있었다.

편리하지만 윤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들의 이동 방식이 이번에는 썩 반가웠다.

숲에서 긴장한 탓인지 익숙한 주방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윤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이담은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연월은 기다란 식탁 위에 놓인 꽃 바구니를 들고 가더니 곧 찻잔을 내왔다.

찻잔 속에는 노란 꽃 한 송이가 떠 있었다.

“이건 무슨 꽃인가요?”

윤희가 묻고는 바로 차를 마셨다.

“국화, 마음을 진정시켜 줄 거야.”

“고마워요. 차도, 조금 전의 일도.”

연월의 대답에 윤희가 고마움을 전했다.

“오늘 네가 바림, 그러니까 경계 구역으로 간 건 길을 잃어서야, 그렇지?”

이담이 나긋하게 물었다.

“……네.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서천인에게 바림은 위험한 곳이야. 그곳에는 망령을 잡아먹는 괴물이 살거든.”

“괴물이요?”

“그래. 그러니 실수로라도 다시는 그곳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해.”

“네.”

윤희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윤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 ‘괴물만 잘 피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또 그곳으로 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모두가 잠든 밤, 윤희는 살그머니 집을 나서 바림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밤이라면, 어쩌면 괴물이 잠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희는 바림을 향해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뎠다.

지난번에 만난 짙은 안개는 없었다.

다만 또 얼마가지 못하고 도깨비불에 둘러싸였다.

작고 무수했던 도깨비불은 모두 모여 큰 불이 되었다가 다시 작은 불로 나뉘며 윤희를 희롱하고 위협했다.

때문에 윤희는 어디로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윤희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이담이었다.

그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죄송해요.”

고개 숙인 윤희는 이담의 손에 이끌려 바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엔 꼭두새벽을 노렸다.

주변을 살피고 바림으로 들어가 벌써 세 번째로 걷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이른 새벽의 숲에는 물고기가 유유히 떠다녔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물고기가 나무 사이를 유영하는 그 장면은 너무도 몽환적이었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불길한 소리가 밀려들었다.

사락, 사락, 사락.

스, 스, 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만치 보이는 바닥에 엄지 손가락만 한 자라가 떼를 지어 기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다가오는 자라 떼를 보고 윤희가 잠시 걸음을 주춤대다 뒤로 돌아선 순간이었다.

“으악.”

무언가와 부딪히고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

그곳에는 무심히 윤희를 내려다보는 연월이 서 있었다.

윤희를 일으켜 세운 연월은 말없이 그녀를 그녀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얼마 뒤, 연월과 이담이 동시에 서천을 비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흔하지 않은 좋은 기회였다.

그날 윤희는 대낮에 바림으로 들어가는 과감함을 선보였다.

과감한 도전의 결과는, 역시 실패였다.

신비로운 바림의 숲에 발을 들이자 이번에는 도무지 이 세상의 존재라고 볼 수 없는, 윤희의 키만큼 두껍고 커다란 백사가 그녀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신성하고도 위압적이 그 위세에 압도되어 윤희는 온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길 위에 우뚝 선 윤희가 하염없이 식은땀만 흘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용맹한 백호 랑이 그녀를 단숨에 구해주었다.

랑은 코앞까지 다가온 백사를 제치고 윤희를 입으로 낚아채 뛰어올랐다.

랑은 쏜살같이 달렸다.

쏜살같이 달려가 랑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연월의 집이었다.

분명 비어있어야 할 집이건만 연월과 이담이 기다렸다는 듯 마중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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