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28화

28 운명 3

by 아무




“라-앙!!”

허억, 허억.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기다 윤희는 이내 풀밭 위로 풀썩 쓰러졌다.

하늘은 검으나 허공에서 빛을 밝히는 명주 덕분에 마당이 낮처럼 환했다.

처음 만난 날보다 못해도 열 배는 자란 랑이 제 덩치는 생각도 않고 윤희의 집 마당을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녔다.

뒤따르던 윤희의 기척이 사라지자 랑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슬렁어슬렁 느긋하게 걸어오는 하얀 호랑이의 모습이 위압적이나 겁을 먹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덩치에 비에 작은 귀를 팔랑거리며 다가오는 랑이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윤희는 엎어진 김에 풀밭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 곁에 바싹 다가와 랑도 털썩 주저앉더니 제 머리를 윤희의 배 위에 턱 얹었다.

“흐응-.”

랑이 긴 콧김을 내뿜었다.

“푸흐흐.”

콧김이 배를 간지럽히자 윤희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윤희의 웃음소리가 한참 동안 마당을 메웠다.

랑과 한바탕 뛰고 실컷 웃었더니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연월과 이담은 현관 옆 의자에 나란히 앉아 이 광경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후우-.”

윤희가 숨을 크게 몰아 쉬며 하늘로 시선을 옮겼으나 명주의 빛이 너무 눈이 부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만 같다.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지만 한경보다야 이곳이 저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자신이 정령이건 인간이건, 그 무엇이건 서천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한경에 대한 미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나 보다.

지금 그 미련이 훌훌 날아가 버렸다.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윤희는 반정령으로 서천에서 살아갈 날을 기대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윤희의 움직임에 랑도 고개를 들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묘해.”

“묘해.”

연월의 말에 이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따라 말했다.

백호는 대대로 월신의 혈족과 계약하고 복종했다.

그러므로 연월과 계약한 백호 랑은 연월에게만 복종해야 했는데, 지금의 상황으로만 봐서는 윤희가 랑과 계약한 듯 보였다.

연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티 내지 않았지만 윤희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안이 깊었다.

오늘 그 깊이는 얕아졌으나 아직 윤희의 불안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의 작고 어리석은 질투를 지우고 위험 요소가 있는 아직 어린 두 존재의 성장을 지켜봐 주기로 하였다.

“다 컸네.”

이담이 대뜸 말했다.

“다 크긴, 아직 멀었지.”

연월이 랑과 윤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너 말이야.”

“뭐?”

연월이 미간을 구기며 이담을 보았다.

“크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이담이 다정하게 말했다.

“영원히 막둥이 신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제법 성숙해졌달까.”

흠, 이담의 말에 연월이 콧방귀를 날렸다.

“오늘이 보름이던가.”

“응.”

이담과 연월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랑이 둘의 기척을 느끼고 큰 발을 척척 내디디며 연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럼, 이만.”

연월이 인사와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담도 윤희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윤희는 그들이 별안간 떠나버린 마당에 홀로 남았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하다.

땀이 식어 온몸의 털이 주뼛 섰다.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자 언제 온 것인지 식탁 위에 수련의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보내준 푸짐한 음식으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작은 병에 든 밤 조림을 후식으로 먹었다.


몹시 충만한 하루였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기대로 조금쯤은 설레었다.

설렘을 품고 윤희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피곤한 몸은 푹신한 이불에 감싸여 한없이 가라앉았으나 감은 눈 속에는 계속해서 하나의 잔상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조각천에 남긴 편지.

음성과 함께 눈앞에 보인 환시.

어쩌면 이제는 그것을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이국의 말이라고 착각했지만 공부해 보니 정령의 말이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알고 싶었다.

한경에서 그것을 가져올 방법이 없을까.

연월에게는 부탁해도 거절당할 것이다.

서천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제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서천인은 사바와 연이 닿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예외를 둘 수는 없을까.

윤희가 무거운 몸을 뒤척여 옆으로 누웠다.

이담에게 부탁할까.

한없이 관대해 보이는 그이지만 엄격할 때는 연월보다 더 엄격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잊고 지낼 때는 몰랐지만 한번 떠오르고 나니 그 조각천의 내용이 궁금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다.

단 하나의 방법을 제외하면.

이제는 윤희의 머릿속에 그 하나의 방법만이 맴돌았다.

‘직접 나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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