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하늘 아래 우거진 숲의 한 귀퉁이에 푸른 버드나무 한 그루가 느른하게 하늘거린다.
그 버드나무의 그늘 속에 윤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여-.”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윤희는 귀를 쫑긋 세웠다.
감은 눈을 느리게 뜨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담이 손을 높이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찾았어!”
이담이 다짜고짜 말했다.
“무얼요?”
윤희는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자세를 유지한 채 물었다.
“네 어머니말이야.”
이담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찾았다고요?”
윤희가 놀라 물었다.
“아직 확인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네게 먼저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왔어.”
이담의 대답에 윤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통제하게 된 기가 들쑥날쑥 제멋대로 춤을 췄다.
윤희는 다시 온신경을 집중해 차분히 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담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 주방 한편에 놓인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이담이 윤희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해?”
“그럼요.”
“그때 네가 꽃이 보인다는 말을 했었지.”
“맞아요.”
“인간의 명문에는 두 송이의 꽃이 펴. 그렇지?”
“네!”
윤희가 다부지게 대답했다.
“명문에 핀 두 송이의 꽃은 삶과 죽음을 의미해.”
윤희가 이담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꽃이 시들고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한경에서 숱하게 보았다.
그러니 꽃이 지면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 송이는 생명을, 다른 한 송이는 절명을 의미해. 생명꽃은 사람이 나고 자라는 동안 피고 지고, 절명꽃은 네가 생각하는 대로 사람이 병들거나 늙고 쇠하는 동안 피고 지지.”
윤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찻잔 속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 꽃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이담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신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
윤희가 시선을 들어 이담과 눈을 맞추었다.
“그럼 누가 볼 수 있죠? 이담도 보인다고 했잖아요.”
“맞아. 나는 볼 수 있어. 그리고 나와 같은 존재.”
“이담과 같은 존재요?”
“그래. 바로 정령이야.”
“……정령?”
“응.”
“이담은 정령이에요?”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저도 정령인가요?”
“아마도?”
“그렇지만 제 아버지는 평범한 인간인걸요?”
의아해하며 질문하는 윤희를 보고 이담이 웃으며 말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도 완전한 정령이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고. 난 신과 정령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야. 그리고 내 생각에 넌, 정령과 인간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것 같아. 네가 꽃을 본다는 건 정령의 피가 섞였다는 뜻이거든. 그러니 네 어머니는 정령일 가능성이 아주 높지.”
“어머니가 정말 정령일까요? 그럼 어머니는 왜 인간인 아버지와 결혼했죠?”
“왜 네 아버지를 선택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네 어머니가 숲이 아닌 그곳으로 간 이유는 알 것 같아.”
이담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찾아본 기록에 의하면, 사바력으로 20여 년 전에 한 정령이 가련한 인간을 돕다 신들에게 발각되었어. 참고로 신은 몇몇 신과 몇 가지 과업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일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는 규율이 있어. 참고로 신과 정령은 다르기 때문에 정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규율이지. 하지만 그 정령은 신들의 규율을 어긴 죄로 소멸형에 처해졌어. 한 신의 권능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런데 처형의 순간에 그 정령이 갑자기 사라졌어. 그리고 지금까지 행방불명 상태야.”
“그러니까 그 정령이 제 어머니란 말씀인가요?”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윤희가 물었다.
“내 생각엔, 그래. 도원, 그러니까 천계에서 사라진 유일한 정령이거든.”
“그렇군요…….”
윤희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어머니가 정령이었어. 그래서 내가 달랐구나. 그랬던 거야. 이상한 게 아니었어.”
그러다 문득 윤희가 눈을 반짝 뜨고 이담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이매가 아닌 거지요?”
“이매?”
이담이 고개를 갸웃하고 되물었다.
“네, 한경에서는 간혹 저더러 이매라고 멀리했거든요.”
“이매가 정령과 사촌쯤 되긴 하지만 넌 확실히 이매가 아니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윤희를 보고 이담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매도 나쁜 존재는 아니야. 조금 짓궂긴 하지만.”
이담이 코를 찡긋 하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이매라는 말을 항상 안 좋은 상황에서만 들어서 그랬어요. 잘 모르면서 나쁘게 말해버렸네요.”
“괜찮아. 이해해. 이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알려줄 수는 있지만, 지금은 어머니에 대해 더 궁금하겠지?”
“네, 지금은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중요해요.”
윤희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자, 그럼 우선 여기 이 책을 읽어봐.”
쿵!
이담이 식탁 위로 거대한 책 한 권을 꺼냈다.
크기는 윤희의 몸통만 하고 두께는 팔뚝 길이만큼 두꺼운 거대한 책이었다.
“이게……, 뭐예요?”
당황한 윤희가 눈을 깜박이며 묻자 이담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초심자를 위한 도원 생활 백서>.”
“이걸 다 읽어야 하나요?”
“도움이 될 거야.”
“그렇기야 하겠죠. 그렇지만 이걸 언제 다…….”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어쨌든 너도 반은 정령이니 읽어두면 다 쓸 데가 있단다. 책은 서재로 옮겨둘게.”
이담은 거대한 책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참, 온 김에 그동안 얼마나 공부했나 확인해 볼까?”
“에엑?”
“하하하, 그렇게 싫어하는 걸 보니 꼭 확인해 봐야겠는 걸. 빨리 익혀 두는 게 너도 편할 테니 조금만 더 힘내.”
이담은 제법 끈질겼다.
윤희가 녹초가 될 때까지 지금까지 공부한 성과를 확인하고 다음 과제를 위해 수업했다.
그리고 읽어 두면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책장에서 골라 뽑아 두었다.
윤희가 책상 위에 높이 쌓인 책을 우러러보고 질겁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와르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걸 언제 다 읽죠?”
윤희가 넋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이 정도는 금방이지.”
이담이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뿌듯해했다
똑, 똑, 똑.
그때, 누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고, 윤희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반갑고 고마웠다.
윤희는 재빨리 서재에서 빠져나와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서 오세요.”
문밖에 서 있던 이가 되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 어, 안녕.”
놀란 연월이 인사를 더듬었다.
“어쩐 일이세요?”
윤희의 눈이 기대에 차 반짝였다.
그러나 연월의 대답은 윤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훈련이 잘 되고 있나 확인차 왔어.”
“오늘은 정기 훈련일이 아닌데요.”
윤희가 투덜이듯 말대꾸하자 연월이 난처한 얼굴로 멀뚱이 섰다가 뒤이어 나오는 이담을 보고 어째선지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선 차를 마시자.”
연월의 제안에 윤희는 어쩔 수 없이 주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윤희의 뒤를 따르는 연월의 눈에 그녀의 어깨가 한껏 굽어 보였다.
“오늘 훈련이 끝나면 랑을 불러줄게.”
연월이 알맞게 우린 차를 따르며 윤희를 회유했다.
“랑이요?”
“응.”
윤희의 얼굴에 밝은 기운이 조금 되돌아왔다.
“좋아요. 까짓 거 얼른 하자고요.”
연월이 가져온 다식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입을 우물거리다 찻잔에 남은 차를 쭉 들이켠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덩달아 연월도 찻잔을 비우고 주방을 나섰다.
주방에 혼자 남은 이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희는 다시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 눈을 감았다.
피로로 제어되지 않던 기의 균형을 맞추고 흐름에 집중했다.
“좋아, 잘했어. 이제 균형 맞추기쯤은 아주 쉽게 해내는구나.”
“그럼 이제 랑이를…….”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네?”
“지금부터는 네 모든 기를 한 곳에 모으는 연습을 할 거야.”
“……네.”
윤희의 수련은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하루 사이에 핼쑥해진 윤희는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겨우 랑과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