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25화

25 잿빛 나비 3

by 아무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참을 망설이던 윤희가 우물쭈물 말했다.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윤희에게 어머니는 곧 세상이었다.

때문에 윤희는 어머니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가 아닌 그녀의 존재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어머니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으로 살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신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윤희의 가슴을 내리쳤다.

어머니가 낯선 여인으로 둔갑했다.

윤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가족이라고 해서 다 알 수는 없지.”

홍윤이 가라앉은 윤희를 다독였다.

“그래, 또 막상 떠올리려고 하면 잘 안 떠오를 때가 있어. 지금은 생각나지 않던 것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갑자기 생각날 수도 있고, 아니면 며칠 뒤에 불현듯 떠오를 때도 있으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생각이 안 나면 뭐 어때, 괜찮아.”

이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윤희를 달랬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가 너에게 물었지.”

연월이 차근히 말을 시작했다.

“너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그런데 넌 네 어머니가 그러하니 너도 그럴 것이라고 했어. 어머니의 무엇이 달랐지?”

“……, 글쎄요. 지금 곧장 떠오르는 건 꽃이에요. 꽃 이 한 송이었다는 거.”

윤희가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그랬지. 분명 그것과 관련 있을 거야.”

이담이 고개를 불쑥 내밀고 윤희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래서 저도 꽃이 한 송이뿐인 걸까요? 그래서 다른 걸까요?”

걱정스럽게 묻는 윤희의 찻잔에 수련이 차를 따랐다.

“다른 게 아니야. 넌 특별한 거야. 서천에서는 우리 모두가 특별해.”

윤희는 곁에 선 수련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선아.

어머니의 이름이다.

희고 고운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 윤희는 어머니보다 어여쁜 여인을 보지 못했다.

이는 윤희의 작은 자부심이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러주던 자장가, 등허리를 어루만지던 가느다란 손길, 곧고 선한 눈빛, 그리고 곁에 머무는 상쾌한 바람.

바람.

어머니의 곁에는 언제나 선선한 바람이 머물렀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이라도 어머니 옆에만 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다리에 꼭 붙어 있곤 했다.

어린 날의 그 기억이 떠올라 윤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맞아요. 우린 특별해요.”

두 눈을 반짝 뜨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머니 곁엔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머물렀어요.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일군 텃밭에는 채소들이 아주 풍성하게 잘 자랐답니다.”

텃밭에서 채소를 수확하는 어머니 곁에 앉아 나무작대기로 흙바닥에 글자 연습을 했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윤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음, 그리고 어머니는 약손이었어요. 제가 말한 적이 있던가요? 아홉 살까지는 몸이 약했어요. 그래서 거의 집에만 있었는데, 어머니가 주기적으로 치료해 주었어요. 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엄마 손은 약손’ 하고 노래할 뿐이었지만, 그때마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졌어요. 지금처럼요. 만약 어머니가 계셨다면 건강해진 제 모습을 보고 기뻐했겠죠?”

윤희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지자 홍윤이 안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물론이지. 아주 대견해하셨을 거야. 그런데 어디가 아팠던 거야?”

“항상 체기가 있고 몸이 약해 기력이 없었다는 것 말고는 콕 집어 어디가 아팠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걸.”

수련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저도 너무 신기해요. 제가 그렇게 건강해졌다는 게 말이죠.”

이때 연월이 남다른 윤희의 기운을 지금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기력이 없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생각도 그래.”

이담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월의 말에 동의했다.

“그 치료라는 걸 하고 나서 어땠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

“어머니의 손이 닿으면 꽉 막힌 뱃속이 편안해지고 손끝의 감각까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몸의 감각 외에는? ”

의문 어린 표정으로 이담이 연이어 물었다.

“음……, 그러니까.”

윤희가 잠시 망설였다.

“그런 날에만 보였어요. 꽃이.”

윤희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홉 살이 된 해에 어머니가 연기처럼 사라지셨는데, 그 후로 기력이 돌아오고 제 몸이 건강해졌어요. 허깨비처럼 보이다 말던 꽃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하고, 또…….”

망설이는 듯하다가 윤희는 사뭇 비장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물을 다룰 수 있게 되었어요.”

홍윤과 수련은 의문으로 가득 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희를 바라보았다.

“물을 다룰 수 있다고?”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다룬다는 게 어떤 의미지?”

홍윤이 물었다.

그러자 윤희가 손을 들어 허공에서 물방울을 만들어 보였다.

그 자리의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경에서 보았던 두려움이나 경멸과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어머, 신기해라.”

수련이 아이처럼 웃으며 감탄했다.

그녀의 시선과 윤희의 시선이 맞닿았다.

윤희의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죄송해요. 이렇게 오래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울먹이며 말하는 윤희의 어깨를 이담이 도닥였다.

그리고 연월은 이담과 눈을 맞추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비밀이었다면, 네 비밀을 말하고 말고는 네 뜻이니 누구도 관여할 수 없어.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홍윤이 윤희의 손을 꼭 붙잡았고, 수련은 조용히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윤희의 어머니는 분명 굉장한 미인이었을 거야. 윤희가 이렇게 어여쁜 걸 보면.”

“그건 맞아요! 제가 한경에서 어머니보다 고운 여인을 본 적이 없다니까요. 아! 그렇다고 제가 곱다는 건 아니고요.”

윤희가 멋쩍게 웃었다.

조금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밝게 피어올랐다.

“그나저나 나비는 어디로 갔을까요?”

문득 의문이 들어 툭 내뱉은 윤희의 말에 모두가 홍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홍윤과 눈이 마주친 윤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뒤로 걸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윤희의 말에 홍윤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옷깃을 젖히지 않아도 하얀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잿빛 나비 모양 반점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졌어요.”

윤희가 눈을 꿈벅거렸다.

수련도 목덜미를 들어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월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연구할 게 많겠는걸.”

이담도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두 눈을 꼭 감은 뒤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윤희가 호기롭게 말했다.

“좋아! 그 말 무르기 없기다.”

이담이 냉큼 받아들였다.

순간 자신이 너무 섣불리 제안한 것 같아 잠시 멈칫했지만 윤희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요, 한경에서는 물 때문에 곤혹을 치르곤 했지만, 이제는 제 쓸모를 증명해 보일 때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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