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26화

26 운명 1

by 아무




서천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윤희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시간은 느리게, 하지만 착실하게 흐르고 있었다.

윤희는 그날 이후로 흘러가는 시간을 착실하게 채워 나갔다.

오전에는 연월에게 배운 기의 흐름을 단련하고, 오후에는 서재에서 이담이 골라준 책을 읽거나 새로운 언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틈틈이 주어온 밤으로 밤 조림을 만들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단련은 힘들었고, 어려운 책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언어는 생경했다.

또 밤 조림은 어머니의 손맛은커녕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 나 죄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윤희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서천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윤희의 집에 편지가 도착했다.

내일 저녁 만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경혜’

편지 끝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러나 앞선 두 번은 이르게, 그리고 연달아 경험했기 때문일까, 슬픔과 괴로움보다는 안타까움과 약간의 아쉬움 정도에 불과했다.

어느덧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아득해진 한경보다 이제는 서천이 더 제 집, 제 고향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이런 때에 불쑥 작별이 찾아왔다.

윤희는 반듯하게 적힌 그녀의 이름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눈앞에 경혜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긴 한숨을 내쉬고 무거운 몸을 주방으로 이끌었다.

윤희는 오늘도 어김없이 밤 조림을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성공해 내고야 말았다.

다음 날 오후, 윤희는 수련의 집을 방문했다.

바구니를 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김에 어젯밤에 만든 밤 조림의 맛도 그녀에게 먼저 선보였다.

“어때요?”

윤희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나, 세상에.”

수련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이걸 네가 혼자 만들었다고?”

윤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정말 맛있어. 살짝 짭조름한 첫맛과 적당히 달콤한 뒷맛이 일품이야. 밤 본연의 맛도 아주 잘 살렸는걸-.”

“정말이요? 어젯밤에 드디어 성공했어요. 그래서 조금 많이 만들었지 뭐예요. 오늘 저녁 만찬에 가면 다른 분들께 나눠드릴까 하는데, 어때요?”

“좋은 생각이야. 내가 도와줄 일은 없니?”

수련의 물음에 윤희가 냉큼 대답했다.

“바구니를 빌리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바구니?”

수련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아하!’ 웃었다.

“그럼 되고 말고.”

수련은 자신의 바구니를 윤희에게 선뜻 내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윤희는 병에 소분한 밤 조림을 바구니 가득 담았다.

그리고 만찬에 어울릴만한 의복을 골라 갈아입고 서둘러 명주를 불렀다.

경혜의 집 마당에는 이미 많은 서천인이 모여 있었다.

“윤희야, 와 주었구나.”

경혜가 막 도착한 윤희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았다.

“그럼요, 당연히 와야죠.”

윤희도 밝게 인사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먼저 와 일을 도운 홍윤과 수련이 윤희 곁에 다가왔다.

윤희는 미처 경혜에게는 표하지 못한 슬픔을 눈에 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헤어지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아, 그렇지?”

홍윤이 윤희의 두 볼을 감쌌다.

“하지만 우린 약속했어.”

홍윤이 슬쩍 수련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련도 미소를 지으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명부의 때가 되면 이곳을 떠나기로.”

뒤를 잇는 수련의 목소리가 윤희의 귀에 쓸쓸하게 들렸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어. 그래서도 안되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홍윤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우는 듯이 보였다.

마침 연월과 이담이 도착했다.

“자, 다 모인 것 같으니 만찬을 시작할까요?”

경혜가 소리쳤다.

늘 그렇듯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만찬이었다.

식사를 마친 윤희가 평소와 달리 수줍게 말을 꺼냈다.

“저,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드릴 것이 있어요.”

순식간에 모두의 이목이 윤희에게 집중되었다.

윤희의 이마에 식은땀이 수년만에 흘렀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제가 먹고 싶어서 만든 밤 조림이에요. 드디어 어제 성공을 했거든요.”

“어머나, 세상에.”

“이렇게나 많이?”

“맛있겠다.”

“후식에 곁들이면 딱이겠어.”

저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윤희는 경혜에게 먼저 병을 건넸다.

경혜는 서슴없이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밤을 꺼내 곧장 입에 넣었다.

“너무너무 맛있어, 윤희야.”

경혜의 눈이 반짝였다.

얕게 눈물이 고였다.

특별하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유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고마운 선물이었다.

“내 정신 좀 보라지.”

경혜가 손에 묻은 양념을 핥아먹으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윤희는 수련과 홍윤, 연월과 이담의 도움을 받아 만찬에 모인 모두에게 밤 조림을 나누어 주었다.

이윽고 경혜가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저도 약소하지만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제껏 환히 웃던 이들의 얼굴에 서서히 슬픔이 떠올랐다.

경혜는 빠짐없이 준비한 선물을 하나씩 주인을 찾아 건네주었다.

고운 천에 꽃이 수 놓인 손수건이었다.

윤희는 경혜가 준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차오르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윤희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혜의 두 볼에도 눈물이 흘렀다.

“모든 것이 평안했어요. 이승에서 겪은 모욕을 떨쳐내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러니 슬퍼 마세요. 제 남은 즐거움을 모두 쏟아 내고 마침내 가야 할 곳으로 떠나는 것이니까요.”

경혜의 작별 인사에 사람들은 애써 눈물을 거두었다.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작별의 시간이 찾아왔음을 의미했다.

연월과 이담이 경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유채색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작별할 때가 되었다.

모두가 경혜에게 받은 손수건을 흔들었다.

“고마워요.”

경혜도 마당의 끝자락에서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서 그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연월과 이담이 경혜를 꽃밭으로 인도했다.

“이 꽃밭에서 그대의 꽃을 찾아.”

이담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드넓은 꽃밭에서 제 꽃을 찾으라고요?”

경혜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절로 찾아질 거야.”

이담이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요?”

“꽃만 찾으면 돼. 그게 다야.”

경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연월과 이담을 번갈아 보았다.

연월도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경혜는 거듭 고마움을 표하고 꽃밭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광활한 꽃밭에 핀 수많은 꽃이 경혜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이 끝없이 펼쳐진 꽃밭 속에서 단 한 송이의 꽃을 찾아야 했다.

경혜는 일순간 막막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저절로 찾아질 거라는 이담의 말을 믿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꽃 한 송이가 경혜의 눈을 사로잡았다.

풍성하고 화려하게 핀 꽃은 아니지만 시들어 가는 그 꽃이, 노란 그 꽃이 경혜의 눈에는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잘 버텨주었구나. 고생했어.”

경혜는 노란 꽃 옆에 모로 누웠다.

고귀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경혜는 엄한 부모 아래에서 엄격한 규율과 억압 속에서 자랐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큰 죄를 짓는 것과 다름없다 하여 혼기가 찼을 때는 부모의 뜻대로 얼굴도 모르는 어느 양반의 적자와 혼인했다.

부모의 그늘이라는 짐을 하나 덜어내자 다른 짐이 하나 늘었다.

남편이 외도를 일삼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숨기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나중에는 아주 보란 듯이 하였다.

그 무렵 경혜는 어렵게 얻은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 틈을 노려 첩을 들였고, 끝내 경혜를 내쫓고 말았다.

비 내리는 겨울밤의 일이었다.

경혜는 비탄에 빠져 내리는 비를 모조리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경혜 앞에 연월이 나타났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나로 지낼 수 있어서 좋았어.”

낮게 읊조리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울어지는 꽃과 함께 경혜가 스러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연월과 이담이 짧은 묵념으로 조의를 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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