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23화

23 잿빛 나비 1

by 아무




서천의 하늘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흐르는 구름이 없어도, 반짝이는 별이 없어도.

그러나 지금 윤희의 눈에 들어온 맑고 푸르른 하늘은 그녀를 비웃는 듯하여 바짝 약이 올랐다.

“명주여, 나를 인도하라.”

길을 잃은 윤희가 끝내 명주를 소환했다.

이제 서천에서 길 잃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성급한 판단이었나 보다.

윤희는 긴 한숨을 내쉬고 눈앞에 나타난 명주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어젯밤, 윤희는 문득 밤 조림이 먹고 싶어 졌다.

조청을 넣어 달콤하게 조린 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저녁 무렵 선들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아버지는 산에서 밤을 주워 왔다.

그러면 그 밤으로 어머니는 밤밥도 짓고, 화로에 굽기도 하고, 조청에 조려 주기도 하였다.

특히 밤 조림은 윤희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건강하지 못했던 어린 윤희가 영 기운이 없는 날이면 어머니가 어김없이 만들어 준 특별한 간식이기 때문이다.

한 번에 세 알.

어머니는 다정하면서도 엄격했으므로 정해진 규칙을 꼭 지켜야만 했다.

그러다 이따금 어머니 몰래 부엌에 숨어들어 아버지와 먹던 그 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밤 조림이 간절히 먹고 싶어진 밤이었다.

숲 속에서 잘 익은 밤이 열린 밤나무를 발견한 탓인지도 모른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밤 조림이 머릿속에 한 번 떠오르자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러한 연유로 윤희는 어젯밤 잠자리에 누워 결심했다.

밤을 주우러 가겠노라고.

이른 아침에 눈을 뜬 윤희는 곧장 숲으로 들어갔다.

“이쯤이었는데.”

작은 가방을 둘러메고 이제는 익숙해진 서천의 숲길을 거침없이 걸었다.

휘이잉.

거센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무언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오솔길 저편에서 들려왔다.

윤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찾았다!”

낙엽 위로 떨어진 밤송이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윤희는 조심조심 바닥을 살피며 밤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입을 쩍 벌린 밤송이의 겉껍질을 두 발로 꼼질꼼질 벗기자 잘 익은 밤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준비해 온 집게로 알밤을 한 알 한 알 집어 작은 가방에 담고, 가시 박힌 빈 껍질은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바닥에 떨어진 밤송이는 모두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했고, 윤희의 작은 가방은 알밤으로 두둑해졌다.

윤희는 가방을 다 채우고 나서야 뻐근해진 뒷목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각난 푸른 하늘 아래 나란한 두 밤나무가 다른 계절에 섰다.

한 그루는 짙은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입 벌린 갈색 밤송이와 아직 덜 여문 초록 밤송이가 주렁주렁 열렸고, 그 옆에 선 다른 한 그루는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겨울을 지내는 중이다.

서천은 시간이 제각각 흐른다.

서천인도, 꽃도, 나무도 마찬가지다.

겨울눈을 단 앙상한 가지가 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지와 맞닿아 있고, 연둣빛 새로 난 잎사귀를 팔랑거리는 나무가 풍성하게 열매를 맺은 나무와 이웃했다.

윤희에게 열매를 내어준 밤나무는 가을을 지내는 중이었다.

사계절이 한 계절인 서천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원하는 계절을 누릴 수 있다.

윤희는 지금 가을을 찾아왔다.

‘한경도 지금쯤이면 가을 옷을 입었겠지.’

산이 노랗게 또는 붉게 물들고, 차가운 바람이 두 볼을 감싸는 계절.

협탁 위에 놓인 사바의 달력이 10월의 끝자락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그 무렵 먹었던 음식이 문득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윤희는 언제나 맑은 서천의 싱그러운 공기를 코로 한껏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묵직해진 가방을 고쳐 멘 뒤 풍족해진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눈앞에 잿빛 나비 한 마리가 살랑살랑 날아왔다.

‘어라, 웬 나비가……?’

신기하게도 서천에는 벌레가 없었다.

그럼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땅은 비옥했다.

이곳에서 딱 한 번 곤충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도월의 노리개에서 나온 나비였다.

‘그래! 홍윤의 뒷덜미로 가 반점이 되었던 그 나비잖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날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그런데 그 잿빛 나비가 어째서 숲 속을 날아다니고 있을까.

나비의 존재가 의심스러우면서도 조금은 반갑기도 하였다.

서천에는 나비도 벌도, 끔찍이 싫어했던 파리와 모기도 없었다.

그러니 이 나비가 특별한 존재인지, 아니면 한경에서의 저처럼 쓸모없고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지는 스스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따금 텃밭에 날아왔던 호랑나비와 파란 나비와는 크기도 모양도 달랐지만 한경의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충분했다.

잿빛 나비가 유혹하듯 윤희 앞을 맴돌았다.

“따라오라는 뜻이니?”

윤희가 나비에게 물었다.

대답해 줄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비는 팔랑팔랑 한가로이 숲길 위를 날았다.

윤희도 나비를 따라 숲길을 걸었다.

나비는 이 나무 저 나무, 이 꽃 저 꽃, 이 풀 저 풀, 골고루 앉아 쉬었다.

풀잎 위에 살포시 앉으면 윤희도 살금살금 다가가 나비를 관찰하고, 날아가면 따라 걷고, 나뭇가지에 앉으면 까치발을 하고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윤희가 따라잡을만하면 날아가고, 다 따라잡았다 싶으면 날아가기를 반복했다.

마치 윤희를 골리려는 듯이.

이윽고 윤희는 약이 바짝 오르고 말았다.

“내가 너 잡고 말 거야.”

처음에는 그저 나비가 신기하고 반가워 따라다녔는데, 나중에는 약이 올라 오기로 따라붙었다.

헉, 헉.

먼저 지친 쪽은 당연하게도 윤희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두둑한 가방이 애물단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윤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윤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나비는 홀연히 사라졌다.

윤희는 낮은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알밤이 든 가방을 꼭 껴안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나는 왜 나비를 따라다닌 거지?”

느닷없이 나타난 신비한 잿빛 나비에 홀려 이유도 없이 숲길을 헤매고 다녔다.

“아무래도 나비에 단단히 홀렸었나 봐.”

잠시 이성을 되찾은 윤희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비의 모습을 상기했다.

날갯짓 한 번에 얄미움이, 또 억울함이 쌓였다.

“내가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공을 노려보았다.

윤희의 눈에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눈알을 몇 번 굴리다 고개를 획 하고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온통 숲이다.

지난 삼 년간의 노력으로 집 근처 숲은 눈감고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낯선 숲은 구분이 어렵다.

이곳은 윤희에게 낯선 숲이었다.

끝까지 나비의 희롱에 놀아나고 말았다.

윤희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여겨졌지만 지금은 의기소침해 있기보다는 길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서천의 숲은 광활하다.

혼자 힘으로 되는 일과 되지 않는 일이 있다.

이 숲에서 길을 찾는 것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어 혼자 길을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윤희는 끝내 명주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명주여, 나를 인도하라.”

윤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괘씸한 것은 나비인데 맑은 하늘까지 얄밉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윤희의 눈에 유난히 쾌활해 보이는 명주도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명주의 안내를 따르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얌전히, 약간의 투덜거림을 곁들인 상태로 길을 걸었다.

“나는 그냥 어떤 나비인지 궁금했을 뿐이라고. 도월 나리가 준 노리개에서 나온 나비잖아. 그러니까 어떤 나비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마치 명주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혼잣말했다.

휘릭.

명주가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목적지 부근임을 알려주는 움직임이었다.

남은 불만을 삼키고 윤희는 숲의 끝자락에 섰다.

드넓은 꽃밭이 시작되는 그 길 끝에 서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고 한쪽으로 치우쳤던 생각이 환기되었다.

명주가 집이 아닌 꽃밭으로 먼저 안내한 이유이리라.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꽃밭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었다.

“역시 아름다워.”

윤희는 기분 전환도 할 겸 얼마간 꽃밭의 풍경을 감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윤희의 시야 속으로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 들어왔다.

“앗!”

윤희가 소리치며 명주를 바라보자 역시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윤희는 천천히 꽃밭으로 들어가 나비를 쫓았다.

그러나 아무리 쫓아도 나비는 도무지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멀어져만 갔다.

‘또 명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건가?’

윤희가 뒤돌아 명주를 바라보자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훌쩍 날아와 나비에게로 길을 안내했다.

명주를 따라 걸으니 나비가 금세 눈앞에 나타났다.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비가 한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저 아래에 뭐가 있는 걸까?’

윤희는 그 아래에 특별한 꽃이 있나 싶어 유심히 살폈다.

별 다를 것 없는 꽃이었다.

사실 서천의 꽃은 사바와는 달라서 모두 특별한 꽃이지만, 그중 더 특별한 꽃일까 하는 의문에서 살핀 것이었다.

“흠, 내가 다가와도 나비가 도망가지 않네. 이 근처에 분명 무언가가 있는 거야.”

나비가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돌다 바로 옆 개울 위로 날아든 바로 그때였다.

개울 속에서 반짝하고 빛이 났다.

그 순간 명주가 부르르 떨렸다.

윤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큼 강한 빛이었다.

또 동시에 강한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빛이지?”

눈을 뜨고도 몇 번 더 꿈벅이다 윤희가 명주를 향해 물었다.

명주가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윤희도 고개를 갸웃하고 잠시 고민하다 슬금슬금 개울가로 기어갔다.

그리고 납작 엎드린 채로 개울 속에 있는 돌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분명 이 근처였는데, 그렇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빛을 내뿜었던 물체는 윤희의 눈에 쉬이 띄지 않았다.

“안 되겠어.”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린 다리를 주무르더니 신발과 양말을 벗고 개울물에 발을 담갔다.

또 양 손끝을 맞대고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눈앞에 갖다 대고는 물속을 더욱 신중히 살폈다.

그것이 무슨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점은 반짝이는 물체를 금세 찾았다는 것이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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