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22화

22 폭우 6

by 아무




어느덧, 한낮의 공기마저 시릴 만큼 차가워진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관아의 서쪽에 위치한 객사에서는 아침부터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이 바로 보름인 까닭이다.

현령 희상은 객사의 방 안에 홀로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귓전을 맴돌던 바깥의 소란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가려진 시야 속으로 정체 모를 화첩 하나가 떠올랐다.

화첩은 희상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펼쳐지고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가며 자신이 품은 것을 모두 내보였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그 광경까지도.

이번 가을 한경의 풍경이 그려진 화첩을 보니 그 짧은 계절이 올해는 유난히도 길었다.

많은 일이 휘몰아친 탓이다.

여간해선 뛰지 않는 한 군관이 헐레벌떡 달려와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잔뜩 굳은 얼굴로 보고를 올리는 한 군관의 모습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산사태로 무너진 산 아래에 시신과 백골이 쏟아져 내려왔다는 그의 보고가 쉬이 믿기지 않았다.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둘러 오작인을 불러라.”

한 군관과 함께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한 희상은 예상보다 더욱 심각한 사건 현장의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산사태라고는 하나, 이 많은 시체가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다 이렇게 한날한시에 쓸려 내려왔단 말인가.’

너무도 처참한 그 광경을 도저히 직시할 수가 없었다.

그때를 회상하는 희상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패었다.

그날 이후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동원하고 갖은 애를 썼으나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도월이 손을 내밀기 전까지는.

‘도월, 그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직도 안갯속을 헤매고 있겠지.’

희상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그러니 한경의 안녕을 위해, 내 자식이 살아갈 터전을 위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도월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덥석 잡은 것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희상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어쨌든 골치 아픈 문제들이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뒷맛이 쓴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적의 우두머리를 효수한 날, 착호인들이 돌아왔다.

무려 두 마리의 범을 지고서.

포획한 범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백호였다.

삼 년 전부터 소문만 무성하던 그 백호를 드디어 잡은 것이다.

착호인들은 득의양양하게 행진했고, 그날은 고을 곳곳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나리의 덕이 높아 드디어 한경에 복이 왔습니다.”

“현령 나리 덕분에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나리. 이게 다 나리의 은덕입니다.”

연쇄된 문제가 착착 해결되니 관리와 민중은 입을 모아 현령을 칭송했다.

그럴 때마다 희상은 마음 한편이 쓰라렸다.

표면적으로는 현령의 공이 컸으나 그 이면에는 도월의 계책이 있었다.

석연치 않은 이 기분은 제가 원하지도 않는 남의 공을 가로챈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또한 도월 그 자가 의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면 이 일로 그에게는 어떠한 이득이 있을까.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자였다.

‘계집을 몰래 빼돌린 보상이라고는 하나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걸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죄인들은 대체 어디에 쓸 생각이란 말인가.’

희상은 이제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니 그가 말한 지옥의 의미를 떠올려 볼 수 조차 없었다.

“팔열 지옥이라 하였던가…….”

긴 한숨을 내쉬며 희상이 천천히 눈을 뜨자 바깥의 소란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리,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아전이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희상도 막 옷을 다 갈아입은 참이었다.

하얀 제의를 입은 희상이 객사의 앞마당으로 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얀 옷 때문인지 희상만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희상이 마당의 중앙에 놓인 멍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자 아전이 작은 상을 하나 내왔다.

그 상에는 지필묵이 올려져 있었다.

그러자 제의 시작을 알리는 북이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두웅-!!

우렁찬 북소리가 멈추고 사위가 고요해졌다.

희상은 그와 동시에 종이에 축문을 써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흩어지고 달빛은 더욱 환히 빛났다.

희상은 낮고 선명한 목소리로 축문을 읽기 시작했다.

“아뢰옵니다.

00년 10월 15일, 한경의 현령 전 희상은 만월신 백귀 님께 삼가 고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신께서는 한경의 백성들을 굽어 살펴주시고, 은덕을 베풀어 주시길 간곡히 청하고자 여기 맑은술과 음식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 잔을 올리니 흠향하시옵소서.”

희상이 제사상에 잔을 올리고 절을 드렸다.

그리고 축문이 적힌 종이를 태움으로써 모든 의식은 끝이 났다.

달밤에 하얀 제의를 입고 제사를 지내는 희상의 모습은 그가 백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이날 제사에 참석한 이들에 의해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그 자태가 우아했다.

정작 당사자인 희상은 그런 타인의 눈길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형옥으로 발을 재촉했지만.

통금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 나리, 어쩐 일이시니까?”

형옥을 지키던 포졸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제를 지내는 동안 다녀간 이가 없느냐?”

“예. 아무도 없었습니다.”

포졸이 현령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

포졸의 대답에 돌아서던 희상은 묘한 불길함이 느껴져 옥사가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화적 떼가 있는 옥사가 어디냐?”

“북측입니다.”

북측 옥사라면 감시가 가장 삼엄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상대는 도월이 아니던가.

희상은 북측 옥사로 걸음을 옮겼다.

형옥의 문을 지키던 포졸 하나가 현령을 따라나섰다.

“됐다. 혼자 가겠다.”

희상은 포졸을 물리고 홀로 옥사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북측 옥사가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서서히 밀려왔다.

“고작 이런 일로 불안해하다니.”

희상이 고개를 들고 달을 보며 중얼대다 옥사를 지키는 포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포졸들은 갑자기 나타난 현령을 보고 많이 놀란 듯이 보였다.

“뭘 저리들 놀라.”

의아해하던 희상은 제 옷차림을 떠올리고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백귀라도 나타난 줄 알았느냐.”

“혀, 현령 나리.”

포졸 하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사했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인간이거늘.”

희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시간에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건 알 것 없고, 열어라.”

“예. 나리.”

이유는 모르지만 현령의 명을 착실히 수행하는 포졸이었다.

이번에도 포졸 중 하나가 뒤따르자 말없이 손만 들어 물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

희상은 옥에 갇힌 화적의 수를 세며 걷다 발을 뚝 멈추었다.

“벌써 다녀갔군 그래.”

죄인 여덟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희상은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며 옥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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