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20화

20 폭우 4

by 아무




둥, 둥, 둥, 둥!

이른 아침 큰 북소리가 울리고 관아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에서 걸어 나오는 우람한 덩치의 착호인 여섯은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풍채를 뽐냈다.

험상궂은 외모의 착호인들은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자들이었고, 사명감 또한 마찬가지였다.

믿음직스러운 그들에게 거리의 구경꾼은 응원을 보냈다.

이른 시간임에도 거리는 그들을 응원하는 행인들로 북적였다.

“저 산에서 쏟아져 나온 시체 중에 절반이랬나? 범이 잡아먹었다는 게.”

“그렇다지? 아마.”

행인 중 하나가 옆에 선 지인과 이야기를 시작하자 뒤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한 사내가 말을 섞어 왔다.

“내가 봤는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린가?”

“그때 산사태 났을 때, 내가 가서 봤는데, 죄 배가 갈리고 손가락이 잘려 나간 시체였어. 범의 이빨자국은 얼마 없었을걸?”

제법 정확한 목격담이었다.

“얼마가 됐든 잡아 먹힌 놈이 있으니 범을 잡긴 잡아야지.”

왼쪽 사람이 뒤를 흘긋 보았다.

“아니, 그럼 화적 떼부터 잡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가만 생각해 보니 요즘 마을에 범 내려왔단 소리를 못 들었는데.”

오른쪽 사람은 반쯤 돌아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밀매하는 놈들이나 화적 놈들은 여즉 내버려 두고 왜 범부터 잡느냐는 거지.”

뒷사람이 지나가는 착호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에라이, 이 사람들아. 그런 말 말게. 그 화적 놈들이 요새 코빼기도 안 보이니 현령도 답답해서 범부터 잡지 않겠나? 어련히 알아서 다 할 테지.”

왼쪽 남자도 반쯤 돌아서서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어쩐지 마을이 조용하다 했어. 화적 놈들이 안 보여서 그랬던 거구먼.”

오른쪽 남자가 말을 거들었다.

“이번 현령이 고생 꾀나 하겠어.”

뒷에 선 사내가 비죽 웃었다.

그날 오후, 강 건너 산어귀에 수십여 명의 군사가 집결했다.

선발대로 뽑힌 십수 명은 사냥꾼으로 위장했고, 나머지는 각종 무기로 무장한 채 순라를 도는 척 집결지에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현령도 그곳에 얼굴을 내밀었다.

화적 떼 소탕에 현령까지 직접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민생의 안정에 힘쓰고 있는 수령의 모습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현령의 옆으로 다가와 은밀하게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은신처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 일망타진할 기회입니다.”

“시작하지.”

현령은 망설임 없이 작전 개시를 허하였다.

이에 대장이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사냥꾼으로 위장한 군관들이 흩어져 산을 올랐다.

얼마간 거리를 두고 군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어귀에는 현령과 그의 호위 무사 둘, 그리고 군관 셋만 남아 만일을 대비했다.

작전이 시작되고 한 시진(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팔 소리가 온산에 울렸다.

작전이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현령은 곧바로 말에 올라타 미련 없이 관아를 향해 달렸다.

현령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아 앞 광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비키시오! 비키시오! 길을 여시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군졸이 멀리서 달려오는 현령과 호위 무사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문지기의 외침에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이 빠르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슬금슬금 두 갈래로 갈라져 길을 열였다.

‘그새 소문이 이렇게 퍼진 것인가. 소문은 명마보다 빠르다더니. 아니, 어쩌면 그자가 미리 손 쓴 걸지도 모르지.’

현령이 속도를 늦추고 인파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무슨 일인데 이리들 모여 있소?”

어느 행인이 까치발을 하고 앞사람에게 물었다.

“아, 글쎄 이번 현령이 화적 떼를 몽땅 잡아들였다잖수.”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사람 잡아가서 장기 팔아먹는다는 그 화적 놈들 말이오?”

“그렇다니까. 현령이 직접 나서서 잡았다고 하더라고. 그놈들이 어지간했어야지.”

“그럼 죄인들은 지나갔소?”

“현령이 지금 왔으니 곧 오지 않겠수.”

“그런데 화적 놈들 잡은 건 어찌 안 거요?”

“저 문지기가 그랬답니다. 저 강 건너 산에서 나팔이 울리자마자 소리쳤다던데.”

“확실한 거요?”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여기 서서 기다려 보면 알 것 아니우.”

행인은 목을 쭉 빼고 긴 대로의 끝을 응시했다.

현령이 말을 타고 달려온 그 길 위로 부옇게 흩날리던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현령 희상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주인 없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손님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길어졌습니다.”

희상이 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일이 잘 되었나 보군.”

도월은 개의치 않았다.

“못 될 것도 없지요.”

도월이 고개를 끄덕이고 슬쩍 미소 지었다.

“백성들의 환대는 마음에 들던가?”

희상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역시 이 자가 말을 흘렸나 보군. 괜한 짓을…….’

아직 그의 도움이 필요한 탓에 희상은 제 얼굴에 떨떠름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다행이군, 그래. 그나저나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약속.

도월의 말에 희상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짜고짜 찾아와 자신이 고민하는 일을 모두 해결해 주겠다던 도월.

백귀, 범, 화적, 식량.

이것을 어떻게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식량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농작물을 되살릴 도술이라도 부린다면 모를까.

마치 희상의 생각을 읽은 듯이 도월이 입을 열었다.

“내 이국에서 들여온 비료가 있네. 그것이 죽은 벼도 살린다 하여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지. 마침 잘 되었어.”

“무엇이 잘 되었다는 말입니까?”

“밑져야 본전인데, 농사꾼들에게 비료를 나눠 주자 이 말이야.”

“농사꾼들이 비료를 안 줘서 흉작이겠습니까.”

“보통 비료가 아니라 하지 않았나.”

도월이 입꼬리를 올리고 희상을 뚫어지고 보았다.

“뭐, 좋습니다. 뭐든 해보지요. 하나 한경의 재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비료값은 나리가 부담하십시오.”

“당연한 것 아니겠나. 효험을 알아보기 위함이니.”

“자, 그럼 이제 나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지요.”

“화적 떼를 잡거든 그 죄인들을 내게 인도해 주게.”

“그들을 어디에 쓸 생각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범을 사냥하고, 화적을 잡아들이고, 구휼미를 배포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겠나?”

희상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백귀?”

“맞네. 백귀에게 제물을 올려야지.”

“그저 전설일 뿐인 백귀 아닙니까?”

“그럼 조상님께 제사는 왜 지내는 것인가. 그저 전설일 뿐인 백귀라도 제물을 바치고 나면 백성들의 마음은 얼마간 안정이 되겠지. 화적 한 무리만 잡아 죽여도 다른 놈들은 당분간 조용할 테니 그 효과로 생각할 테고.”

희상은 도월의 말이 나름 일리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도월의 작전은 지금까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착실히 진행되었다.

범이야 착호인들의 재량에 달린 문제지만, 착호인이 산속을 헤집고 다니면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화적이라도 함부로 설치고 나다니진 못할 터였다.

그러니 이러한 때를 노려 은신처를 덮쳤다.

아무도 찾지 못한 화적 떼의 은신처를 도월이 알려준 덕분이었다.

이 일로 희상은 도월을 조금 신뢰하기 시작했다.

뒤로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약속한 일은 지키는 듯하니 조금쯤은 믿어보자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관아로 돌아오는 길에 둘러본 논밭도 불과 며칠 전과 달리 제법 생기 있어 보였다.

나눠 준 이국 비료의 효과가 벌써 나타나는 듯하였다.

그 풍경이 희상의 믿음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쌀은 내 미리 가져다 놓았네.”

도월이 생각에 빠진 희상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들어오는 길에 보았습니다. 구휼미는 두었다가 수장의 참형이 이루어진 뒤에 배포할 예정입니다.”

“그게 좋겠군. 배가 부르면 화적에게 관심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희상이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댁에 가 계시면 죄인들이 당도하는 대로 알려드리지요.”

희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래에서 도월이 얻을 만한 이득이 없다.

그러나 거래를 먼저 제안한 것은 도월이다.

손해 보는 거래를 할 리가 없는 자인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터이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아 희상은 마음 한편이 답답했다.

도월을 지나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아참, 윤희라는 계집을 찾는다던데.”

“나리가 그 계집을 어찌 아십니까.”

희상의 눈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계집에게 맺힌 것이 많다 들었네.”

“우리 집안에 해를 끼쳤으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 계집이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내 명줄을 끊어 놓았을 것인데.”

“저런, 삼 년이나 지났는데 여즉 찾는 걸 보면 보통 원한이 아닌 모양일세.”

“내 아비를 잡아먹은 것도 모라자 내 아들까지 홀려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니 보통 원한이겠습니까?”

“그 계집 내가 데려갔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네. 내가 데려갔어.”

“그 계집은 죄인입니다. 돌려주시지요.”

“그럴 수 없네. 하지만 걱정 마시게.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 버렸으니.”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니요?”

“있네, 그런 곳이. 이번 거래는 그 계집을 그대 몰래 데려간 보상 정도로 생각하시게.”

희상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오히려 내가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도월이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활짝 웃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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