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18화

18 폭우 2

by 아무




“비! 비다! 비가 온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기뻐했다.

그야말로 가문 땅에 내리는 단비였기 때문이다.

긴 기우제에도 꿈쩍 않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극심한 가뭄으로 논밭은 쩍쩍 갈라지고, 수확이라고 해봐야 죄 쭉정이뿐인 데다, 더 이상 뜯어먹을 산나물도 없고, 우물까지 다 말라버렸으니 간절한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사정없이 흩날리던 흙먼지가 뿌옇게 시야를 흐릴 때면 피폐해진 그들의 마음에도 흙먼지가 끼었다.

그렇기에 이보다 반가운 비는 없었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폴폴 날리던 흙먼지가 빗물에 가라앉자 그들의 마음에 낀 흙먼지도 씻겨 나갔다.

비는 내리고 또 내렸다.

산과 들을 충분히 적시고, 계곡과 강에 깊이를 더했다.

그러나 비는 나흘동안 이어졌다.

잦아드는 기색도 없이 줄곧 세차게 쏟아졌다.

이윽고 논과 밭이 물에 잠기고, 강물이 불어 둑 위로 흘러넘쳤다.

흙길은 진창으로 변해 발목까지 푹푹 빠졌고, 집집마다 마당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은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그토록 비가 오길 바랐건만, 이제는 비가 그치길 바랐다.

모두가 마음을 졸이며 다시 기도를 드렸다.

그 덕분인지 다행히 비는 닷새를 넘기지 않았다.

닷새 째 아침,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떠올랐다.

툇마루까지 올라와 찰랑이던 물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러나 큰 일은 따로 있었다.

산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지난밤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그때 산사태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십여 채의 집이 무너지고, 또 십여 채의 집이 흙에 반쯤 파묻혔다.

여기저기에서 곡소리가 울렸다.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간 이도 여럿 있는 까닭이다.

정호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자신의 잘못은 없지만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물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완전히 빠졌다.

그러나 길은 여전히 진창이었다.

“길이 좀 마르고 나면 가 봐야겠어.”

정호는 부엌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다 문득 도월의 저택 상황이 궁금해졌다.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도월이라면 산사태도 어떻게든 막았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정호는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정호는 아침 일찍 도월의 저택으로 향했다.

긴 비로 지반이 약해진 산길 대신 오랜만에 마을 안길로 걸어가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머지않아 행랑아범이 나와 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대문을 다 두드리고.”

“간밤에 별일 없었소?”

정호는 저택 안을 한 번 휘 둘러보고 행랑아범의 표정을 살폈다.

“비가 쏟아진 것 말고는 별일 없었지.”

“뒷산은 괜찮소?”

“다행히 멀쩡해. 아아, 비 때문에 산엘 못 가 여기로 왔어?”

“나리는 계시오?”

정호가 대답도 하지 않고 물었다.

“아, 그럼 계시지.”

행랑아범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정호는 도월의 침소가 있는 안채로 성큼성큼 걸었다.

“아직 기침 안 하셨어. 뭐 급한 일이라도 있는가?”

행랑아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래, 내가 나리를 만나서 뭐 해. 도술이라도 부렸습니까? 하고 물을 수도 없고.’

정호는 도월을 만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거 없소.”

정호가 던지 듯 대답하고 저택의 뒷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땅은 축축하지만 질퍽하지 않고, 후원의 화초는 싱그럽기만 하다.

나흘간 억수 같이 쏟아부은 비가 도월의 저택만 피해 간 듯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전경이었다.

뒷문으로 연결된 산길도 행랑아범의 말 그대로 정말 멀쩡했다.

“역시.”

정호는 저택 이곳저곳을 살피며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리 살피는 게냐.”

느닷없이 들려온 도월의 목소리에 정호가 화들짝 놀랐다.

“기,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뭘 그리 살피느냐 물었다.”

“비가 많이 왔으니 어디 망가진 곳은 없나 살펴보았습니다.”

정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언제부터 내 집에 그리 관심이 많았느냐?”

정호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뭐, 됐다. 망가진 데가 있더냐?”

“없습니다, 나리.“

“다행이구나.”

도월이 작게 미소를 띠었다.

“혹,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정호가 슬쩍 눈치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 거 없다.”

도월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정호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정호를 도월이 빤히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큰비가 내리더구나.”

“예, 나리. 저도 들어만 봤던지라 반신반의했는데, 그 말이 참말이었습니다.”

“그래, 나도 이제 그 말을 기억해 두어야겠다.”

도월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아직 산길이 좋지 않을 것이다. 일은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나리.”

뒤돌아서는 도월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정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근데 나리는 여기까지 왜 나오신 거지?”

잠시 의문을 품었다가 도리질을 쳤다.

“그냥 나오셨겠지, 뭐. 자기 집인데.”

지난밤, 도월의 저택도 산사태를 피하지 못했다.

우르르, 쿵, 쾅, 덜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뿌리째 뽑힌 나무와 바윗덩어리가 흙더미에 뒤섞여 저택의 뒷담장으로 쏟아져내린 것이다.

잠에서 깬 행랑채의 사용인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아유, 이를 어째!”

“빨리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피할 데가 어디 있나.”

“이러다 우리 다 깔려 죽게 생겼네-!”

“어떡하면 좋아. 진짜 큰 일 나겠어!”

가만히 서서 수선을 떠는 사용인들에게 행랑아범이 버럭 성을 냈다.

“나리부터 깨워야지 뭣들 하는 거야!”

막 침소에 들어 잠을 청하던 도월이 다급한 부름에 눈을 떴다.

“웬 소란이냐.”

“나리, 큰일 났습니다. 뒷산이 무너졌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행랑아범이 서둘러 달려와 도월에게 고했다.

도월이 느릿느릿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얀 침의 바람으로 비를 가릴 우산도 없이 용마루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느른하게 주위를 둘러본 도월이 양팔을 아주 천천히, 천천히 들어 올리자, 쏟아지는 빗줄기가 방울방울 맺히더니 둥실둥실 도로 하늘 위로 솟았고, 후원을 덮친 흙더미와 나무, 바윗덩어리는 슬금슬금 도로 산으로 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또 앞마당에 고여 찰박이던 빗물도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이제 도월의 저택은 비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용마루에서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선 도월.

행랑채 앞에 모여 발을 동동거리던 사용인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모두 넋을 놓고 말았다.

뒤늦게 사용인들을 발견한 도월은 가볍게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쓸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용인들이 눈을 끔벅대며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더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마당에는 도월과 행랑아범만 남았다.

도월은 혼자 남은 행랑아범에게 물러가라 손짓한 후, 다시 침소에 들었다.

정호는 점심을 먹고 나른한 몸을 방에 뉘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들쳐보던 딸의 서책도 이제는 지겨워졌다.

그래도 바깥에 나갔다 왔다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기도 해서 잠시 상념을 떨치고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가, 정호는 그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그가 아득한 기척에 눈을 떴을 때, 창호문이 온통 붉게 빛났다.

정호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온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것이다.

“하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호는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사발 들이켰다.

부엌의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여인들의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바로 근처에서 마을 아낙들이 모여 수런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다.

평소 남 일에 관심 없는 정호지만 ‘산사태’와 ‘해골’이라는 단어를 듣고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정호는 슬그머니 다가가 아낙들에게 물었다.

“뭔 일 있소?”

“에구머니나.”

여인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서 있자, 장 씨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무너진 산에서 백골이 나왔다네, 글쎄.”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지금 나온 백골만 해도 다섯 구는 된다던데?”

“시체는 그보다 더 나왔다지 않았어.”

저마다 한 마디씩 덧붙였다.

“시체가 그렇게나 많이 나왔소?”

정호가 놀라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현령도 직접 와서 보고 갔다고 하더라고.”

장 씨 부인이 말하며 정호의 집을 흘끔 보았다.

“그 집은 괜찮소?”

“혼자 사는 집, 안 괜찮으면 어떻소.”

정호는 불퉁하게 답하며 생각했다.

‘그 시체들은 분명 백귀를 흉내 내는 놈들의 소행일 테지.’

어쩌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호는 그중 하나가 도월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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