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16화

16 서천 6

by 아무




“명주야, 명주야.”

윤희가 자기 앞에 둥실둥실 떠가는 명주를 불렀다.

“혹시 지금 홍윤의 집에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해?”

집으로 돌아가다 문득 목적지를 달리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명주는 네가 한 말을 이해했다는 듯 두 번 오르락내리락하고는 소리 없이 공중분해되었다.

보이지 않는 둥근 막이 사라지고 그 속을 채우고 있던 연기 같은 것들이 일시에 터져 나와 안개처럼 사라졌다.

“어, 어? 어디 갔지?”

순간 당황한 윤희는 명주가 있던 자리로 팔을 뻗어 허우적대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큰일이네. 집에는 어떻게 가지?”

그 자리에 발을 멈추고 우뚝 섰다.

머지않아 명주가 있던 자리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체가 생겼다.

홍윤의 명주다.

윤희는 다시 나타난 명주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명주가 제자리에서 휘리릭 회전했다.

마치 내가 왔으니 안심하라는 듯이.

긴 오솔길을 걸었다.

수련의 집으로 가는 길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얼마 후, 그 길의 끝에 큰 목조 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 일을 마친 명주는 다시 미련 없이 사라졌다.

쾅, 쾅.

묵직한 쇠문고리로 문을 두드려 방문을 알렸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목조 건물을 둘러싼 나무들이 일시에 술렁거렸다.

“어서 와.”

천천히 문이 열리고 윤희를 본 홍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쩐 일이야?”

“용무가 있는 건 아니고 이곳저곳 탐방해 보려고요.”

윤희는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잘 왔어. 들어와.”

홍윤은 윤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걸어오느라 목마르지?”

“조금이요.”

“어디에 다녀왔어?”

“수련의 집이요. 아침 식사를 챙겨 주셨거든요. 그래서 감사 인사도 할 겸 그릇을 돌려드리고 왔어요.”

“기분 좋은 아침을 맞았겠구나.”

“네, 너무 좋았어요.”

“여기에 앉아 있으렴.”

홍윤이 응접실을 나갔다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마침 수련이 보내준 진달래화채가 남아 있었어.”

윤희는 홍윤이 내어준 진달래화채를 마시며 아침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했다.

창문에서 떨어졌는데 버드나무가 받아준 일, 아침 식사가 배달된 일, 의도치 않게 명주의 쓰임을 알게 된 일 등 서천에서는 별스러울 것 없는 일들이 윤희에게는 마냥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쾅, 쾅.

“또 손님이 왔나 보네.”

윤희에게 양해를 구하고 홍윤이 응접실을 나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죠.”

홍윤의 놀란 목소리가 응접실까지 들렸다.

윤희는 마시던 화채 잔을 내려놓고 열린 응접실의 문틈으로 현관을 내다보았다.

문 밖에는 행색이 너절한 연월이 서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머리에는 나뭇잎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나무에서 떨어졌어.”

“네?”

홍윤이 더 크게 놀랐다.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던 윤희도 놀라서 달려갔다.

“어쩌다가요?”

“랑의 훈련을 끝내고, 같이 놀다가.”

정작 나무에서 떨어진 당사자인 연월은 무덤덤하다.

“어떻게 놀았길래 이렇게 돼요?”

“나무에 올라가서 놀았어. 요즘 부쩍 나무에 오르는 걸 좋아하더라고.”

홍윤과 윤희는 똑같이 입을 떡 벌리고 연월의 이야기를 들었다.

“놀다가 가지 사이에 낀 열매를 발견했어. 그래서 그걸 빼내느라 그만.”

“세상에. 다친 곳은 없어요?”

홍윤이 연월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랑이 받아줘서 다치진 않았어. 아! 물론 위장한 크기로.”

연월의 얼굴에 뿌듯함이 내비쳤다.

“그런데 옷이…….”

홍윤의 눈치를 보며 연월이 말을 얼버무렸다.

“옷이야 새로 만들면 되죠.”

홍윤이 실소를 터뜨렸다.

연월은 그제야 자신의 긴 머리카락에 주렁주렁 매달린 나뭇잎들을 털어냈다.

“내 정신 좀 봐. 나뭇잎만 털어내고 들어와요. 마침 윤희도 와 있답니다.”

홍윤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선 윤희를 가리켰다.

연월은 고개를 끄덕이고 옷에 뭍은 흙먼지까지 세게 털어낸 뒤 문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이걸로 갈아입어요.”

홍윤이 건네자 연월의 옷이 순식간에 새것으로 바뀌었다.

윤희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홍윤의 손에 찢어진 옷이 들려 있다.

윤희에게만 놀라운 일이었나 보다.

“이건 이틀 뒤에 찾으러 와요.”

홍윤은 그것을 보고도 태연히 수선할 옷을 펼쳐 들고 구석구석 상태를 확인했다.

연월이 또 고개만 끄덕이고 응접실로 발을 옮겼다.

홍윤의 손에 들린 옷을 멍하니 쳐다보던 윤희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랑은 어떤 훈련을 해요?”

응접실의 의자에 앉아 윤희가 물었다.

“내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

“복종 훈련이요? 그런 걸 꼭 해야 하나요?”

윤희는 자신의 기억 속 자그마한 랑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과 계약한 신수는 신의 부름을 거역해선 안 돼. 그런데 가끔 부름에 응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어.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려면 어릴 때부터 훈련을 해 두어야 해. 그래야 성체가 된 뒤에도 조련하기가 수월하거든.”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어떤 훈련을 했어요?”

“오늘은 ‘기다려’와 ‘이리 와’를 연습했어.”

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랑이 보고 싶다.”

“다음에 일정이 맞으면 보여 주지.”

“와, 정말요?”

홍윤이 연월이 마실 화채를 준비해 왔다.

“무슨 일이야?”

“연월이 랑과 훈련하는 걸 보여준댔어요.”

“어머, 정말?”

“네, 너무 신나요.”

윤희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때 윤희의 치마허리에 달린 노리개가 달랑거렸다.

“노리개를 달고 있었네.”

홍윤은 이제야 발견한 윤희의 노리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윤희는 서천에 온 뒤로 신기한 일이 많아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도월의 부탁을 잊고 말았다.

아침에 나갈 채비를 하면서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윤희는 자신도 놀랄 만큼 도월의 부탁을 망각하고 있었다.

백귀에게 전해 달라던 노리개, 윤희는 치마허리에서 노리개를 빼 들었다.

‘어쩐지 도월 나리에게 속은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이건 전해 줘야겠지?’

윤희는 노리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근데 옥에서 빼 달란다고 정말 옥에서 빼 주기만 하다니. 내가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던가? 현령한테 맞아 죽으나 서천 와서 생령이 되나 결국 이승이 아닌 건 같잖아. 지내보니 맞아 죽는 것 보다야 서천이 훨씬 좋기는 한데……. 아니, 그렇지만 서천에 대해 미리 얘기해 줄 수도 있었잖아. 나리는 분명 백귀가 어디로 데리고 가는 지도 알고, 서천이 어떤 곳인지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면서 내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둥 원하면 데려가 줄 거라는 둥 그렇게 말하다니. 괘씸해. 역시 아버지 말이 맞았어. 그리 좋은 분이 아닐지도 몰라. 그나저나 어떡하지? 그래도 부탁받은 일이니 전해줘야겠지?’

윤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대체 뭐기에 백귀에게 전해달라고 했을까? 나리의 정체는 뭐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어. 나와 비슷한 능력이 있었잖아. 순순히 전해줘도 될까? 혹시 전해줬다가 백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이 서천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윤희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홍윤이 지그시 윤희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때, 연월이 노리개와 윤희를 번갈아 보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윤희는 노리개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떡하지?’

연월에게 건네기가 망설여졌다.

이번엔 연월이 윤희와 눈을 맞추었다.

“내게 주라던가, 그 나리라는 사람이?”

윤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게 주면 돼. 너는 고민할 필요 없어.”

연월의 말에 윤희는 탁자 위에 노리개를 올려놓았다.

연월이 손을 뻗어 그것을 집는 순간 윤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당장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서히 눈을 뜨고 노리개를 든 연월을 보니, 그도 무엇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앞뒤로 돌려가며 살펴보고 있었다.

그래도 모르겠는지 연월은 그것을 홍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녀에게 노리개를 내밀었다.

홍윤 역시 궁금했는지 흔쾌히 손을 뻗었다

그런데 홍윤의 손이 닿는 순간, 잿빛 나비 한 마리가 노리개 위에 앉았다.

느리게 움직이는 날개 아래로 잿빛이던 노리개는 색을 잃고 텅 비었다.

나비는 응접실 안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그리고 홍윤의 어깨에 올라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윤이 연월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몰랐다.

“이담을 불러야겠어.”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이담은 알까요?”

“글쎄.”

윤희의 질문에 연월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셋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나비가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홍윤의 목 뒷덜미로 가 반점이 되었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15화15 서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