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늦게 웬 꽃이 폈대.”
저택 뒷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내려오다 후원의 모감주나무를 발견한 정호가 중얼거렸다.
‘때늦은 모감주나무의 꽃은 큰비를 부른단다. 이때는 과하게 대비해도 부족함이 없으니, 단단히 채비해 두렴.’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가물었는데 잘 됐지, 뭐”
남 일처럼 생각하던 정호의 머릿속에 자기가 밟아 온 버석한 산길이 떠올랐다.
“산에도 풀이며 나무며 죄 말라비틀어졌는데, 이거 괜찮나 모르겠네.”
혼잣말하며 뒷문으로 들어섰을 때, 저택의 주인 도월과 딱 마주쳤다.
“어이쿠, 나리!”
정호가 뒤로 넘어갈 뻔한 지게를 고쳐 멨다.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도 내 집인데,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구석진 데라 예까지 오실 일이 잘 없으니 하는 말이었습니다.”
“안다. 그런데 뭘 그리 혼자 중얼대며 오는 것이냐.”
“별말 아닙니다. 그저 모감주나무에 꽃이 폈길래 그걸 보고 혼잣말했을 뿐입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이 꽃이 눈에 띄어 예까지 왔다.”
도월이 꽃을 올려다보았다.
“올해는 꽃을 얼마 피우지 못하기에 가물어서 그런가 했더니, 이제야 꽃을 피우는구나.”
도월은 얼굴에 미소를 담은 채 고개를 돌려 정호에게 물었다.
“늦게 핀 이 꽃에게 할 말이 많은 모양이지?”
정호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지게를 담벼락 옆에 내려놓으며 작게 숨을 골랐다.
지게에는 가는 새끼줄로 얽어맨 굵은 땔나무가 넘치게 쌓여 있었다.
‘나리가 저렇게 웃기도 했던가?’
정호가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설 때까지 도월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큼.”
정호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도월의 물음에 답했다.
“곧 큰비가 올 모양입니다. 때를 놓치고 늦게 핀 모감주나무의 꽃은 큰비를 불러온다고 합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느냐?”
도월이 턱을 쓸며 물었다.
“어릴 적 제 어미가 해준 말인데, 어머니의 고향에 그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실제로 겪은 일이기도 하고요.”
“흠.”
도월은 호기심이 동했는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아직 소녀일 적에 놀러 나간 뒷산에서 모감주나무 한 그루만 꽃이 활짝 핀 것을 보았답니다. 그때가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추수를 앞둔 시기였습니다. 아무튼 꽃을 보고 그 이틀 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닷새나 내리 퍼부었답니다. 강물은 붇고, 산사태는 덮쳐오고, 논이며 밭이며 죄 물에 잠겨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게 참말이면 지금도 큰일이 아니냐. 이리도 활짝 피었거늘.”
“그래도 가물었으니 비가 오긴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저 무사히 지나가길 비는 수밖에요.”
한참 말하던 정호가 슬쩍 도월을 눈치를 보았다.
“나리, 여기 이 뒷길도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 해동안 가물어서 그런지 산에도 풀이 다 말랐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무도 버티기가 힘듭니다. 그러니 대비를 해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 산 아래는 어찌 대비해야 하는 것이냐.”
“저도 거기까지는…….”
정호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큰비가 내리기 전에 다들 대비해두어야 할 텐데, 말해도 믿어줄지 모르겠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의 판단이고 운이다. 너는 그저 네 할 일만 하면 된다.”
“예, 그럼 저는 이만 제 할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정호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담벼락에 기댄 지게를 다시 짊어졌다.
“아, 나리.”
도월을 지나쳐 땔나무 창고로 가던 정호가 돌아섰다.
“할 말이 남았느냐.”
“혹 비가 내리면 그칠 때까지 일을 쉬어도 되겠습니까?”
도월이 턱을 쓸며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가 그칠 때까지 쉬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나리. 다른 나무꾼들도 그리 해주십시오. 지금 쌓인 나무로 열흘은 거뜬할 겁니다.”
정호는 한 번 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창고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우.”
“어어.”
장 씨 부인이 반가운지 미안한지 떨떠름한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큰비가 올지 모르니 미리 채비하시오.”
“갑자기 무슨 소리요?”
“속는 셈 치고 믿어 보시오. 그럼 먼저 갑니다.”
귀갓길에 저자에 들린 정호는 우연히 마주친 이웃 장 씨 부인에게만 비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찬거리와 주전부리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저녁부터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 물이 방 안까지 차기야 하겠어?”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지만, 정호는 장작과 화로까지 방 안에 준비해 두었다.
비가 오는 동안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을 가능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방의 한쪽 벽면은 장작이 차지했고, 그 위에는 광주리에 담긴 식재료가 잔뜩 올려져 있었다.
또 젖으면 안 되는 물건들은 옷궤 위로 쌓아 올렸고, 귀중품이랄 것도 없지만 돈과 몇 가지 물건은 한 보따리에 싸 놓았다.
여차하면 그 보따리만 들고 떠날 수 있게.
거기엔 아직 정리하지 못한 부인과 윤희의 물건도 섞여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과하게 대비해도 부족하지 않을 거라던 어머니의 말씀대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준비를 해 두었다.
이런 그의 노고를 치하하는 듯 밤이 깊어지자 내리는 빗줄기가 더욱더 굵어졌다.
정호는 이불을 깔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에게는 이 방 안이 세상의 전부였다.
가을비에 차가워진 공기를 데워주는 화롯불을 함께 쬘 가족도, 구운 햇밤을 나워 먹을 사람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누워 빗소리를 들었다.
“술이나 잔뜩 사 올 걸 그랬군.”
몸을 옆으로 돌려 눕자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아무도 열지 않을 방문이다.
오롯이 혼자 남았다.
문득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윤희가 떠난 지도 벌써 3년이나 되었다.
정호는 아직도 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이 낯설었다.
언제가 되어야 이 적막이 익숙해 질는지.
어쩌면 외로운 팔자라는 그의 사주에 걸맞은 인생이 이제야 시작된 걸지도 몰랐다.
그는 무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운 좋게 아름다운 부인을 만났고 어여쁜 딸까지 얻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복이었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잃고 나니 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이럴 때에는 쉬지 않고 움직여 몸을 고단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축 쳐져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모로 누워 있던 정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안을 휘 둘러보며 할 일을 찾았다.
그때 옷궤 위에 올려둔 딸아이의 책궤가 눈에 들어왔다.
“뭐가 들었길래 이리 무거워.”
상자의 뚜껑을 열고 속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이야기 책이 네 권, 글자 책이 세 권, 붓대가 검은 붓 한 자루, 책 사이에 눌러 말린 꽃 한 송이.
정호는 먼저 이야기 책 중 한 권을 빠르게 넘겨 보았다.
“오랜만이라 글자가 영 안 읽히는구먼.”
이번에는 글자 책 중 가장 쉬워 보이는 책을 한 권 골라 펼쳤다.
“참 나, 내가 내 손으로 책을 펼치는 날이 올 줄이야.”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정호의 손가락 끝은 책에 쓰인 큰 글씨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정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비는 밤이 새도록 세차고 사납게 내렸다.
“큰비라.”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도월은 정호의 말을 상기했다.
“나리, 기침하셨으면 조식을 들일까요?”
방문 너머로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식은 되었다. 술상이나 들여라.”
방문이 스르륵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리, 아직 시간이 너무 이릅니다.”
“하늘도 어두컴컴하니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구나.”
“어두워도 아침입니다, 나리. 식사부터 하시지요.”
“술상을 들여라.”
도월이 다시 말했다.
사용인은 하는 수 없이 방에서 물러났다.
머지않아 들어온 술상에는 밥 대신 안주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도월은 그것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로지 술만 마셨다.
비가 들이쳐 방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도 개의치 않았다.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이며 하염없이 창 너머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비가 내리는 내내 도월의 방 창문은 단 한순간도 닫히지 않았다.
평소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도월의 이런 행동은 사용인들이 보기에 기행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