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당, 산탄젤로 성
로마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일진이 사납다고 해야 할지,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은 내 잘못이 가장 크다.
현대 미술관은 내부 수리였는지 무슨 이유에서 로비의 작은 전시장만 열려 있었고, 보르게세 미술관은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 관람할 수 없었다.
여행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애써 이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조금 우울했다. 이 정도 일로 왜 그렇게 기분이 울적해졌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미술관 앞 공원 벤치에 앉아 마음을 달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원은 몹시 평화롭고 한적했다.
그러다 문득, 기다랗고 뾰족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고흐의 그림이 떠올랐다.
저게 사이프러스 나무인가? 정말 보이는 대로 그린 거구나.
그래, 배가 고파서 그런 거야.
어떤 연결 고리로 생각이 이렇게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우선 '먹자'였다.
마침 바로 옆에 이제 막 문을 연 공원 매점이 있었다.
핫도그와 커피를 샀다.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정말 배가 고프다면 먹을 만한 맛이었다.
신기한 건 어딜 가도 커피는 맛있었다. 이탈리아에 있다는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배를 채우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스스로 그렇다고 세뇌시킨 것에 가깝다.
가방에서 로마 관광 지도를 꺼냈다. 쭉 훑어보며 아직 못 가 본 곳을 찾았다.
산탄젤로 성.
다음 일정이 정해졌다.
그러나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공원에서 조금만 더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벌써 여행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조금 지친 것 같다. 그래서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얼마간 휴식한 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구글 지도를 보며 걷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산탄젤로 성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목적지까지 걷기로 했다.
건물, 가게, 사람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테베레 강에 걸린 천사의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의 양쪽 난간 위로 천사상이 줄지어 서 있고, 천사상 사이로 천사의 성이 보였다.
역시 사람들로 붐볐다. 성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지나는데 천사가 내게 창을 들이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사람들을 헤치고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성 안으로 들어갔고, 그날은 여유를 즐기기로 했기 때문에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서둘러 전망대로 올라갔다.
성벽에 붙어 서서 잠시 바람을 쐬며 로마 시내를 바라봤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무기를 든 다리의 천사상이 마치 성을 지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자 건물 위로 우뚝 솟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멍하니 바라봤다. 그랬더니 문득 성당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지체 없이 성에서 나와 성당을 향해 걸었다. 그리 멀지 않았다.
이틀 전보다 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고, 오랜 기다림 끝에 검색대를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줄을 서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상하다.
지금 입장하는 문이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죄를 용서해 준다는 그 천국의 문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난번에 힘들게 찾은 천국의 문은 처음에 이미 지나갔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날의 나는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녔던 걸까.
아무렴 어때,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지, 하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발다키노 앞에 모여 있었다.
미사가 있는 날이었다.
미사에 참석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예약을 하지 않은 관광객도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발다키노 앞에 쳐진 줄 뒤에 서서 볼 수 있었다.
교황님의 미사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로마에 있을 때는 교황님의 휴가 기간이라고, 이틀 전 투어 때 가이드가 말해 주었다. 그리고 교황님이 미사를 집전했다면, 아마 나는 성당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서서 가방을 꼭 끌어안고 발다키노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한 사람이 헐레벌떡 들어와 예약한 종이를 관리자에게 보여주고 제단 앞에 늘어선 의자 중 빈 곳을 겨우 찾아 앉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제단이 들어왔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제법 끈기 있게 서서 말씀을 들었다.
마침내 내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시야가 환해지고 눈앞의 청동 발다키노가 더욱 웅장해 보였다.
흔히 '홀리하다'는 말과 딱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성스러운 노랫소리에 온 마음이 다 정화되고 치유되는 듯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인파 속에서 빠져나와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성당을 나오기 전, 다시 한번 뒤돌아 서서 제단 쪽을 보았다.
천장에서 한줄기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이제야 내 죄가 다 용서받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