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오모와 종탑
뜨거운 열기를 안고 로마에서 출발한 기차가 피렌체에 도착했다.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끌고 기차역에서 막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로마에서 바티칸 투어를 함께 했던 여행자였다.
"언니, 피렌체는 도시가 작아요. 저 반나절만에 다 돌았어요. 여기는 며칠 있을 거예요?"
신기하게도 우리는 고작 한 번 만난 사이였는데, 낯선 곳에서 다시 만났기 때문일까, 무척이나 반가웠다.
"난 3박 4일인데, 마지막 날은 아침 일찍 출발이라 3일이라고 볼 수 있지."
"엄청 여유 있겠네요."
"응, 천천히 둘러보지 뭐."
"우리 또 마주칠지도 몰라요. 안녕."
쾌활한 친구를 잠시 만났더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무거운 짐을 끌고 역사 밖으로 나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드디어 피렌체인가.
공기가 다르다.
뜨겁고 강렬하던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캐리어를 끌고 호텔까지 걸어가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피어났다.
피렌체는 대기 중에 낭만이 향기처럼 떠다녔고, 이따금 골목 사이로 손톱만큼 보이는 두오모가 나를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
나는 숙소에 짐만 던져 넣고 바로 두오모 성당,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는 성당을 코앞에 두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피렌체 패스가 메고 나온 작은 가방 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호텔에서 성당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빠르게 걸어 호텔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에 널브러진 백팩과 캐리어를 다 뒤져도 패스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당황했다.
잠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하고 작은 가방부터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황당하게도 패스는 내가 메고 나간 작은 가방 속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순간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다시 성당으로 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미처 복장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평소 잘 입지도 않는 민소매를 왜 하필 오늘 입었을까.
다시 호텔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며 성당 근처를 서성이다 어느 골목의 한 노점이 눈에 띄었다. 스카프를 파는 곳이었다.
나는 당장 달려가 크림색 스카프를 한 장 샀다. 그리고 당당하게 성당으로 가 줄을 섰다.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혹시 스카프로는 안 된다고 성당에 못 들어가게 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조금씩 생겨났다.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커졌다. 그러나 나는 스카프를 어깨에 두르고 내 걱정과 긴장이 무색할 만큼 아무런 제지 없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먼저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두오모 성당의 필수 코스라 할 수 있는 돔 정복하기.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비좁은 돔 사이를 통과해 정상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떼고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때, 그 기쁨은 그곳에 올라가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런데 마치 돔의 왕관 같은 전망대를 한 바퀴 빙 돌아보는 동안 나는 조금 무서워졌다.
돌바닥이 물결치듯 발아래가 불안했다.
어지러웠다.
서둘러 벽에 등을 붙이고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전경을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급히 내려와야 했다.
아쉬웠다.
힘들게 올라간 돔 전망대인 만큼 피렌체를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당을 나와서도 미련이 남아 성당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외벽을 뚫어지게 감상했다.
그러다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조토의 종탑이었다.
종탑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돌진했다. 그리고 나는 계단을 오르는 그 순간부터 후회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정말 무모했던 것 같다. 하루에 두오모와 종탑을 다 올라갔으니 말이다.
종탑의 중간쯤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잠시 휴식하며 바람도 쐬고 내 정신 상태도 정비했다.
허벅지 근육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종탑까지 정복했다.
힘들게 도착한 전망대는 쇠창살에 둘러싸여 있었다. 다소 생소한 전망대의 모습이었지만, 두오모와 마찬가지로 종탑을 한 바퀴 빙 돌며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오모가 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서서 이제야 진짜 두오모와 마주했다.
거대하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낮게 깔린 주황색 지붕과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어쩐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 풍경은 어떤 예술 작품보다 내게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어느덧 종탑에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 풍경과 헤어지기가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나 '또 언젠가'라는 다음을 기약하며 수많은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두오모와 종탑은 하루에 하나씩만 오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도전하겠다고 한다면 막지는 않겠다.
내게 좋은 추억이 되었듯 누군가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