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공항
해외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유럽 여행, 게다가 장기 여행은 그때가 내 생애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퇴사'라는 것이 내게 마법 같은 용기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때가 아니면 이렇게 긴 여행을 할 기회가 내 평생 다시는 없을 것 같았다.
내 첫 유럽 여행은 런던으로 들어가서 파리에서 나오는 흔한 일정이었고, 기간은 총 7주였다.
지금까지 내가 간 해외여행이라고 해봐야 일본, 제일 먼 곳이 대만이었고, 여행 기간도 길면 6일, 짧으면 3일이었다.
왜 7주인가. 그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날짜와 기간을 정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일단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을 테고, 아마 그 정도면 유럽의 몇 개 도시는 충분히 즐기다 올 수 있지 않을까 라고 판단한 듯하다.
여행을 떠날 때 가장 중요한 건 시간과 돈, 그리고 여권 아니겠는가.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저 세 가지만 있다면.
나의 첫 유럽 여행은 시작부터 큰 난항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여행 경비를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제일 저렴한 비행비 표를 예매한 탓에 인천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 표를 변경하기 위해 항공사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일정 변경이 불가한 표이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김해에서 인천까지 1시간 5분 비행, 대기 20시간, 인천에서 런던까지 11시간 40분 비행.
나는 김해에서 런던까지 총 32시간 45분이 걸렸다.
20시간.
인천 공항을 탐험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인천 공항을 처음 가본 초보 여행자의 가소로운 생각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25분이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미리 잠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환승객이었던 나는 공항 밖을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환승 호텔이나 라운지, 아니면 어딘가 휴식처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어딘가 휴식처는 사실상 실내 노숙이나 다름이 없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일단 저녁을 먹자.
저녁 메뉴를 고르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어떤 식당은 1층에 있고 어떤 식당은 4층에 있었다. 식당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항 지도를 보며 찾아다녀야 했는데, 뭐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공항이 워낙 크다 보니 식당가가 나뉘어 있었을 뿐인데 그때는 그게 참 복잡하다고 느껴졌다.
뭘 먹을까 고민하며 한참을 돌아다니다 힘들게 선택한 저녁 메뉴는 낙지볶음 덮밥이었다. 한동안 이런 붉은 양념의 매운 음식은 먹지 못하리란 생각에 선택한 메뉴였다.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달고 매운 대형 식당 특유의 양념 맛.
밥도 먹었으니 산책 겸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다시 한번 더 4층을 돌아다니며 쉴 곳을 미리 파악해 두었다. 그리고 자꾸 시선이 가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은 바로 하이네켄.
스낵바에서 시원한 하이네켄 생맥주를 한 잔 시키고 편안해 보이는 자리로 가서 무거운 백팩을 내려놓았다. 그때 스낵바의 손님은 나뿐이었다. 콘센트에 휴대전화 충전기를 꽂은 뒤, 잠시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 있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멍 때리기. 공항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대기 시간을 제1 여객터미널 4층에서 보냈다. 그러니까 인천공항 대탐험은 실패라는 뜻이다. 애초에 내 체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여행을 할 때는 몇 시간이고 걸어 다녀도 괜찮은데, 백화점이나 실내 쇼핑몰 같은 곳에서는 왜 그렇게 금세 기진맥진하는지 모르겠다. 공항에서도 그랬다.
맥주를 마신 뒤로는 계속 앉을 곳이나 누울 곳을 찾아 전전했다. 여기저기 기웃대다 운 좋게 냅 존 구석에서 빈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얼른 가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이제 눈 좀 붙여볼까 하는 순간에 어디선가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만 있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코골이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디선가 남자 서너 명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들이 떠드는 소리는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들려왔다.
성격상 원래 그런 곳에서는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에 숙면은 당연히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눈은 감았지만 눈을 감은 채로 밤을 새우게 될 줄은 몰랐다. 토끼잠이라도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역시 나는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조금 불편해도 최대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샤워실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침대에서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왔다.
샤워실 입구에는 벌써 몇 명이 줄을 섰다. 나는 15분 정도 기다린 뒤 샤워실을 이용했다. 깨끗이 씻고 나니 흐리던 정신이 좀 맑아지는 듯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밤새 뒤척였으니 배가 고픈 것도 당연했다.
다시 선택의 기로.
이번에는 라운지로 갔다. 환승 할인을 해준다기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벌써 사람이 제법 많았다. 나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도 하고, 소파 등받이에 푹 기대어 쪽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맥주.
런던행 비행기는 오후 1시 45분이었다. 나는 라운지에서 3시간 동안의 안락함을 즐긴 뒤, 탑승 게이트를 확인하고 조금 빨리 그곳으로 이동했다. 공항 유랑자에서 어엿한 여행자로 변신하기 위해서였다.
게이트 앞 긴 벤치에 앉아 얼마 남지 않은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지난밤의 긴 기다림보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김해에서 출발할 때 느꼈던 설렘이 다시 찾아왔다. 반은 긴장으로, 반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출발이다.
'별일 없이 무사히, 건강하게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