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실수 투성이 여행도 좋은 추억이 되겠지만 조금 더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역시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껏 베네치아까지 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날을 떠올리면 조사와 준비가 부족했던 내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많이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추억 아니겠는가.
내가 예약한 베네치아의 숙소는 산타 루치아 역이 있는 섬 안이 아닌 한 정거장 앞 메스트레 역 근처였다. 메스트레 역에서 산타 루치아 역까지는 기차로 10분 정도 걸렸다. 그래서 가격이 비싼 섬 안 호텔 대신 저렴하지만 조금 거리가 떨어진 메스트레 역 근처 호텔로 예약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무거운 짐을 들고 수상 버스를 타야 하는 부담은 없앴으므로.
그런데 막상 베네치아에 도착하고 두 역을 오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의 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또 다른 짐이 하나 더 생기고 말았다.
내가 메스트레 역 근처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대략 오후 1시경이었다. 당연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 뭐지? 여기가 문이 아닌가?'
혹시 다른 곳에도 출입구가 있나 하고 건물의 전면을 훑어보았지만 문은 하나뿐이었다. 다시 한번 문을 열어 보았다.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눈만 깜박이며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문에 붙은 종이를 발견했고, 그 종이에 인쇄된 체크인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15시~18시.
'아, 바보. 체크인 시간도 확인 안 한 거야?'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호텔을 예약할 때 체크인 시간도 확인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다. 분명 확인했을 것이다. 평소 내 성격에 비추어 보면 확인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제와 추측해보자면, 15시가 3시니까, 3시를 13시로 기억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작은 호텔이고 체크인 시간이 아니라고 해서 문까지 걸어 잠그다니.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역이든 어디든 짐을 맡기고 섬에 들어가 놀다가 체크인 시간 안에 돌아온다. 다른 하나는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며 3시까지 기다렸다가 체크인을 하고 섬에 들어간다.
나는 전자를 택했다. 기차로 편도 10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체크인 시간에 맞춰 왔다가 다시 나갈 계획이었다.
자, 그럼 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길 건너편에 한 호텔이 눈에 띄었다. 나는 바로 길을 건너 그 호텔로 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로비에 직원이 있었다. 접수대로 다가가 내가 더듬더듬 영어로, 건너편 호텔을 예약했는데, 까지만 말하자 그는 어떤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짐을 맡길 때 작성하는 서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투숙객이거나 짐을 맡길 손님이거나.
간단한 정보만 쓴 종이와 1유로를 내밀자 그가 접수대 밖으로 나와 가방을 달라고 했고, 나는 큰 캐리어와 백팩을 넘겨주었다. 그가 내 가방을 끌고 간 로비 한쪽 구석에는 수십 개의 가방이 줄로 묶여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나는 작은 가방 하나만 메고 가벼운 몸으로 호텔에서 나와 조금 전에 내린 기차역으로 가서 산타 루치아 행 기차를 탔다.
드디어 베네치아 섬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늘은 쾌청했고, 날씨는 더웠으며, 물의 도시답게 공기는 습했다.
나는 곧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역에서 멀리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제일 유명한 섬 끝 성당은 나중에 가기로 하고, 우선 역 앞의 다리를 건넜다. 산책이나 하며 이곳의 분위기를 느껴보기로 한 것이다. 어느 좁은 골목을 지나자 작은 수로가 나왔다. 수로 양쪽으로 색이 탁해진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수로를 따라 걷다 보면 건물 사이사이로 좁은 골목이 나왔다. 마치 미로 같았다. 다리를 찾아 수로를 건너고, 다시 좁은 골목을 지나면 수로를 만나고, 이따금 지나가는 곤돌라도 만나고, 좁은 골목 끝에 있는 광장도 만나고, 성당도 만났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역에서 꽤 멀어졌다. 지도를 꺼내 내 위치를 확인해 보니 성 로코 성당 앞이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그때 성당 앞에 있는 조각 피자 가게를 발견했다. 커다란 피자 조각에 눈을 빼앗겼다. 나는 페퍼로니 피자 한 조각을 산 뒤, 가게 맞은편 쇠창살 아래 낮은 돌담에 걸터앉아 내 얼굴 크기만 한 피자를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그 돌담에는 나처럼 걸터앉아 피자를 먹는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돌담에 걸터앉아 피자를 먹는 동안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제 호텔로 돌아가 체크인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더 놀다가 조금 늦게 돌아가기로 했다. 6시 전에만 돌아가면 된다. 그러면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때의 생각이었다.
피자를 다 먹고 다시 지도를 꺼내어 보니 섬 끝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만 갔다가 호텔에 들어가야겠다고 계획을 변경하고, 근처 수상 버스 선착장을 검색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선착장이 있었다.
선착장에 도착한 나는 티켓 자동판매기로 1회권 티켓을 사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결국 타바키로 가서 티켓을 구매했다. 1회권 티켓이 7.5유로라길래 비싸다며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75분 동안 유효한 티켓이었다. 이제 안 사실이다. 그때의 나는 베네치아에 대한 사전 조사를 정말 하지 않았나 보다. 단 하루만 머문다고 해서 그렇게 무지하게 여행을 하다니.
아무튼 나는 목적지와 버스의 번호를 확인하고 배에 올라탔다. 분명 확인했다. 그런데 배가 출발하자 배의 방향이 내가 생각한 목적지의 방향과 달랐다. 제대로 확인하고 배를 탔다고 확신한 나는 곧 배가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점점 확신은 의문으로 바뀌었고, 의문은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반대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산타 루치아 역이 보였다. 우선 배에서 내렸다. 허탈했다. 터덜터덜 역 안으로 들어갔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역 안을 서성이고 있는데,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에 와서 좋아하게 된 것 중에 하나가 레몬 아이스크림이었다. 일단 먹자. 나는 레몬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면서 역 밖으로 나왔다. 역 앞 다리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역 근처나 산책하고 들어가지 뭐.'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나는 역 왼편으로 난 길을 선택했다. 호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가면 가게 등이 양쪽으로 쭉 늘어선 구경거리가 많은 길이었다. 그만큼 사람도 붐볐다. 제법 길었던 그 길의 끝에는 넓은 수로가 나왔다. 아치형 다리 위로 올라갔다. 베네치아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풍경이었다. 색색의 건물들이 물가에 서 있었다.
다리를 건너 물가를 걸었다. 바다로 연결되는 수로였다. 그 길 끝에 서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자 마음속에 응어리져 박혀 있던 침울함 중 하나가 그 바닷물 속으로 빠져나갔다.
'이런 여행도 있고, 저런 여행도 있는 거지!'
바다를 향해 기지개를 켠 뒤, 조금 가벼워진 마음을 안고 바다를 등졌다.
역으로 돌아온 나는 기차를 타기 전에 역 안에 있는 유명한 초콜릿 가게로 가서 이틀 뒤 파리에서 만날 친구와 함께 먹을 초콜릿을 몇 개 샀다. 그리고 아쉽지만 베네치아 섬을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메스트레 역에서 내려 먼저 짐을 찾고 예약한 숙소로 갔다. 호텔 로비에는 여자 직원이 홀로 접수대를 지키고 있었다. 순조롭게 체크인을 하고 방 열쇠를 받은 뒤,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방문이 열리지 않는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혹시 직원이 자리를 비우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리를 지키던 직원은 방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내 말을 듣고 카드 키 두 장을 챙겨 나와 함께 7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방문을 열어 보았지만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여분으로 들고 온 다른 방의 카드 키를 주며 다른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다행히 그 방의 문은 문제없이 잘 열렸다.
예약한 숙소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줄은 몰랐다.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캐리어 가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몇 분 뒤, 문득 저녁 약속이 떠올랐다. 피렌체 야경 투어에서 만난 여행자였고, 다음 날 우연히 카페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던 여자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이들의 일정이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순으로 대체로 비슷하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베네치아에 머무는 날이 딱 겹쳐서 저녁 약속을 한 듯하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면 내가 다시 섬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때의 기분으로는 영 내키지 않았다.
다시 침대 한쪽 끝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문자를 뭐라고 보낼까.
'아무래도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같이 저녁 먹기는 힘들 것 같아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저도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어쩔까 고민 중이었어요.'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남은 여행 무사히 마치시길 바랄게요.'
'네, 좋은 여행 되세요.'
잘 해결된 듯하다.
그러나 저녁은 해결되지 않았다.
호텔에서 나와 메스트레 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역 건너편으로 가보기 위해서였다. 큰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샛길로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어느 도시에나 있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느릿느릿 거리를 걸었다. 특별히 들어가고 싶은 레스토랑도 없었고, 딱히 먹고 싶은 메뉴도 없었기 때문에 역 안 맥도널드로 가서 햄버거를 주문했다. 저녁거리를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가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이제 진짜 휴식이다.
나는 협탁에 놓인 종이가방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꺼내어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하며, 한가롭게 여행 책자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