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 에펠

분실

by 아무





'파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랜드마크가 에펠탑인만큼, 에펠탑은 많은 이들의 로망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파리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에펠탑이었다.

그리고 파리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던 내 친구의 로망은 '에펠탑을 바라보며 샴페인 모엣 샹동 마시기'라고 했다.

우리는 그때 파리에 있었고, 샴페인을 사기만 하면 실현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로망이었다. 거기에 추가 사항이 하나 덧붙었는데, 화이트 에펠까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에펠탑에 오렌지빛 조명이 켜진다. 어두운 배경에 오렌지빛 에펠탑도 아름답지만 밤 10시, 11시, 12시 정각이 되면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린 하얀 알전구가 반짝이듯 오렌지빛 에펠탑에 하얀 조명이 5분 정도 반짝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벽 1시가 되면 오렌지빛 조명이 다 꺼지고 하얀 조명만 남아 반짝이며 에펠탑을 빛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화이트 에펠이라고 한다.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평생 화이트 에펠의 존재도 몰랐을 터이다.

그러니까 에펠탑을 새벽 1시까지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일이 있었던 그날까지 에펠 야경을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러나 모엣 샹동과 화이트 에펠이 없었다. 로망을 정확히 실현시키지 못한 친구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내내 아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친구는 한국에서 온 연락을 받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예정보다 일정을 앞당겨 귀국해야 했다. 친구에게는 이틀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에펠탑을 보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에펠탑으로 갔다.

가는 길에 저녁으로 먹을 피자를 포장하고, 맥주와 안주, 물 그리고 모엣 샹동과 플라스틱 샴페인 잔까지 준비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저녁, 우리는 마르스 광장에 자리를 펴고 앉아 피자를 먹으며 샴페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펠탑에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탑에 조명이 켜졌을 때, 우리는 탑 옆으로 자리를 이동해 거의 누워서 탑을 올려다보았다. 내 시야를 넘치도록 채운 에펠탑의 웅장한 자태도 좋았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더 자리를 이동했다. 이번에는 마르스 광장의 반대편으로 펼쳐진 트로카데로 광장으로 갔다. 이에나 다리를 건너 분수 왼편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오른쪽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시가 되길 기다렸다.

정각이 되기 전에 둘이 번갈아 먼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남은 샴페인을 마시며 휴대전화로 음악도 들었다. 파리의 분위기에 한껏 취했다. 그리고 슬슬 취기도 올라왔다.

드디어 10시가 되자, 하얀 조명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처음 본 듯 신났고 기분이 고조되었다. 이제 11시를 기다렸다. 1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간 적은 없었다. 다시 하얀 조명이 반짝였다. 그리고 문득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어라? 내 폰이 어디 갔지?'

나란히 앉은 친구와 내 다리 사이에 두었던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불현듯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던 어떤 남자가 떠올랐다. 우리에게 담배를 보이며 라이터를 빌려달라고 했던 남자. 그리고 그전부터 우리 뒤에 앉아 계속 신경 쓰이게 했던 남자.

시간은 이미 꽤 흘렀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전화기가 없어졌다고 하자 친구는 멀뚱멀뚱 나를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나중에 듣기로 나보다 더 당황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자 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놀람과 당혹감이 화로 바뀌었다. 그러다 이내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어 황당해졌다. 또 곧 휴대전화를 꺼내놓은 내 자신이 바보 같아 부끄러워졌다. 감정이 격변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저녁부터 샴페인과 맥주를 마신 탓에, 화장실이 너무 급했다. 생리 현상은 감정과 상황에 구애받지 않았다. 웃픈 상황이란 이런 걸까.

우리는 가방 깊숙이 들어 있던 친구의 휴대전화로 우버 택시를 불러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생리 현상을 해결한 뒤, 노트북을 켜고 의미 없는 아이폰 분실 모드를 설정해두었다. 이래저래 하다 보니 새벽 세 시가 되었다.

겨우 침대에 누웠지만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순간 친구를 원망했던 마음과 분위기에 취해 어리석은 행동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했다.

나는 가만히 누워 온갖 잡념을 뿌리치다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친구는 몽 생 미쉘을 안내해준 가이드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고, 나와 함께 경찰서도 가 주었다. 어차피 휴대전화는 못 찾지만 도난 신고 확인증을 받기 위해 간 것이다. 한국에서도 가본 적 없는 경찰서를 파리에서 가다니, 별 일이 다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증을 받고 경찰서에서 나와 친구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여전히 정신은 몽롱하고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나와 얼마 걷지 않았을 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가만히 그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멈춰 선 곳 바로 옆, 경찰서 바로 맞은편에 있던 성당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들어가 볼래?"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응."

나는 힘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성당의 입구를 찾아 발길을 돌렸다.

그곳은 생 쉴피스 성당이었다.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성당이다. 물론 그때는 이 사실을 몰랐다.

우리는 조용히 성당 안으로 들어가 뒤쪽 빈자리에 앉았다. 미사가 진행되고 얼마 후 다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는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멍하니 파이프 오르간의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울컥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아마 옆에 친구가 없었다면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한심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목이 아프도록 눈물을 참았다. 다른 자리로 옮겨가서 혼자 울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미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조용히 성당을 나왔다.

친구는 기운이 없는 나를 위해 스테이크를 사주었다. 하지만 둘 다 반도 먹지 못하고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도 사주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친구의 정성을 생각해서 빨리 기운을 차리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고작 휴대전화를 잃어버렸을 뿐인데, 그때는 그게 너무 큰 재앙 같았다. 평소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 성격인 데다, 살면서 처음으로 도난을 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휴대전화가 없으면 여행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그것에 의존했었다. 그러니 눈앞이 깜깜해질 수밖에. 다행히 휴대전화는 친구에게 두 개가 있어서 하나를 빌려주고 돌아갔다. 그 덕분에 나는 무사히 여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나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쁘지만은 않았던 새로운 경험과 추억을 적립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화이트 에펠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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