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지베르니, 오랑주리

by 아무



오랜만에 아침 산책을 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늘 이용하는 산책로는 집 근처에 있는 하천 공원이다.

물길을 따라 만들어진 이 공원은 계절에 따라 다양한 꽃이 피고 진다. 봄에는 유채꽃이 만발했던 자리에 이제 코스모스가 자란다. 아직 어린잎으로 가득한 풀밭에 드문드문 꽃이 피었다. 흰나비와 호랑나비가 팔랑거리며 반가운 듯 꽃에 날아가 앉았다.

하류 방향으로 길을 따라 한참 동안 걸었다.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 사이에 있는 잔디밭 가운데에 작은 인공 연못이 나왔다. 수면을 뒤덮은 연잎 사이로 봉긋 솟아오른 꽃봉오리와 반쯤 핀 연분홍 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연꽃을 보면 저절로 그 그림이 떠올랐다.

모네의 '수련' 연작.

모네의 그림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나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오랑주리의 '수련'은 캔버스의 크기만으로도 가히 압도적이었다.

타원형의 하얀 방. 벽면을 가득 채운 수면 위의 연꽃.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나도 그 연못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이 된 것만 같았다.

전시실 한가운데는 역시 타원형의 긴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은 언제나 관람객으로 빈틈이 없었다. 한 번은 운 좋게 자리가 비어 나도 잠시 의자에 앉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부유하는 연꽃이 되어 멍하니 시선을 따라 연못 위를 떠다녔다. 그러다 옆 방으로 옮겨 가면 축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린 잎이 되어 연꽃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

예술, 그림, 인상주의는 몰라도 내가 이 그림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나는 니스에서 돌아온 다음 날, 바로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를 방문했다. 파리에서 함께 지낸 친구가 먼저 다녀왔는데 괜찮다며 한 번 가보라기에 곧장 길을 나선 것이다.

넓은 정원 한편에 기다란 이층 건물이 정원을 살피듯 서 있다. 창틀과 덧문,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과 난간, 그리고 현관문까지 선명한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인상적인 집이었다. 그리고 그 선명한 초록이 정원과 매우 조화롭게 잘 어우러졌다. 또 이 이층 집은 어느 방이든 창밖으로 푸르고 화사한 정원이 펼쳐졌다.

정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상상 이상으로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종류의 꽃이 있었다. 세상의 여름 꽃은 다 모인 듯 화사한 정원이었다.

모네가 계획한 도시에 입주한 수많은 꽃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활짝 웃으며 방문객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고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정신없이 꽃을 구경하다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우연히 표지판을 하나 발견했다. 다른 정원으로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초록색 격자무늬로 장식된 짧은 지하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비밀의 숲에 들어온 듯한 그곳은 꽃의 정원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물의 정원이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흐르는 물길과 구름다리, 오솔길, 연꽃 핀 연못, 모네의 그림을 걸어 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경이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초록의 대향연, 그 사이로 살짝 고개 내민 다양한 색과 빛.

이제는 꽃과 나무의 영원한 집이 된 물의 정원을 거닐며 저마다 발견한 멋진 풍경이나 모네의 그림과 같은 풍경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나도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멋진 곳을 발견하면 잠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사람은 많지만 조용했다.

잠시 멈춰 선 곳에서는 아무도 없는 이 정원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이곳에 아무도 없다면 1시간도 못 버틸 겁쟁이는 상상만으로 만족했다.

연못가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숲의 입구에서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대나무, 일본식 다리를 장식한 등나무, 구름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연못, 연못 위에 떠 있는 연잎과 연꽃, 연못 위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버드나무, 구석구석 핀 다양한 꽃, 연못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연못 옆을 흐르는 작은 개울.

그곳은 작지만 진짜 숲이었다.

연못에 뜬 작은 배를 발견하고 모네가 저 배를 타고 물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벌써 기차역으로 가는 셔틀버스의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아쉬움은 다음 여행의 작은 원동력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그 아쉬움으로 인해 오랑주리 미술관을 세 번 방문했다.

그리고 오랑주리 미술관을 세 번째 방문한 날은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 파리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오후 비행기였기 때문에 오전에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못할 시간이었다. 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익숙한 발걸음으로 집에서 나와 미술관으로 갔다.

최대한 다른 사람의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게 주의하며 커다란 두 개의 타원형 전시실을 오가면서 그림을 감상했다. 모네의 정원에 다녀온 뒤, 그림은 내게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마음은 저 아래로 차분하게 가라앉지만 시선은 그림 속에 빨려 들어가는 강렬함을 느꼈다. 그렇게 시선은 연못 위를 떠다녔다.

그러나 나는 연못 위를 오래 떠다니지 못하고 급히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곧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몰래 내 마음속의 늪을 뚫고 올라와 피어난 연꽃 한 송이를 그 연못 위에 띄우고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내 연꽃에게도 그곳이 집이 되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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