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나 공주

런던, 템즈 강

by 아무



그날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기력도 남아돌았다.

오후 3시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런던 아이를 타기 위해 빅벤 옆 웨스트민스터교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쪽 강변에는 빅벤과 웨스트민스터 선착장이 나란히 있고, 다리 건너 맞은편 강변에는 런던 아이와 런던 던전, 슈렉 어드벤처 등 놀거리와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관광객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특히 런던 아이에 정말 많았다.

그러나 나는 템즈 강을 건너는 수많은 관광객을 보고도 런던 아이를 탈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평소 잘 찍지 않던 셀카도 찍었다. 배경에 빅벤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마구잡이로 그냥 찍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화면 속에 내 얼굴 뒤로 초록색 괴물이 나타났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혼자여야 할 화면에 다른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도 놀랄 터인데, 초록색 괴물의 얼굴이 갑자기 등장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정말 너무 깜짝 놀라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초록색 괴물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고개에 힘을 주고 세게 휙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피오나 공주였다.

분장이지만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정말 똑같은 모습으로 웃으며 내게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녀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20파운드를 요구했다.

"너무 비싸!"

나는 또 놀라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두 손가락을 펼치며 "2 파운드"라고 다시 말했다.

"아!"

나는 조용히 동전 지갑을 꺼내 그녀에게 2파운드짜리 동전 하나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내 곁을 미련 없이 떠났다.

아, 당했다...

아니야, 이것도 경험이고 기념이지.

나는 다시 신나게 런던 아이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열흘 뒤, 런던이라는 도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나는 그리니치 천문대에 가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선착장으로 가서 배표를 사고 배 타는 곳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낯익은 얼굴이 내게 다가오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바짝 다가와 한 번 더 권유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피오나 공주는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다른 먹잇감을 사냥하러 떠났다.

흥, 두 번은 안 당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쉬워 보이나?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가며 만나겠는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를 기억했다면 또 사진을 찍으라고 다가오진 않았을 터이다. 내게 또 다가왔다는 것은 그녀에게 내가 꼬드기기 쉬운 대상으로 보였다는 뜻 아닐까.

한국에서도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진짜 길을 묻는 사람,

도를 아냐고 묻는 사람,

내 얼굴에 덕이 참 많아 보인다는 사람,

미술 심리 상담을 해 주겠다는 사람,

등등.

역시 관상은 만국 공통의 과학인가.

괜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강바람이나 쐬면서 마음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며 출발이 머지않은 배에 올라탔다. 대부분의 여행자들과 함께 2층 야외 선상에 자리를 잡았다.

배가 곧 출발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선원이 앞에 나와 템즈 강과 런던 주요 건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영어라서 상징적인 건물의 이름 말고는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주의를 기울여 꽤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그 선원이 상당히 잘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배를 타기 전 가라앉은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거친 강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대신 내 안의 언짢음을 모두 쓸어가 주었다.

그 덕에 나는 다시 행복한 여행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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