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휴대전화 화면 한쪽에 표시된 좌석 번호와 기차 선반에 적힌 좌석 번호를 확인한 후, 자신의 자리를 단번에 찾았다.
2주 전, 기차를 예약할 때 바로 문 앞자리로 예매해 두었기 때문이다.
아직 빈 복도 측 의자에 커다란 백팩을 내려놓았다.
푸슉,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자 뒤따라 들어오던 바깥 열기의 꼬리가 싹둑 잘려 버렸다.
백팩 속 작은 주머니에서 충전 케이블을 꺼내고 가방을 번쩍 들어 선반 위로 올렸다.
털썩 소리를 내며 창가 자리에 앉아 멈춰 있는 창밖 풍경으로 눈을 옮겼다.
이윽고 출발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차내에 울렸다.
소소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귀에 이어폰을 꽂고 몇 시간 후면 라이브로 듣게 될 노래를 재생했다.
공연장 앞은 이미 인산인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상당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부푼 기대감과 고조된 기분으로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자 들뜬 마음이 더욱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소소는 다소 흥분된 마음을 다잡듯 백팩을 고쳐 매고 공연장을 향해 걸어갔다.
왼쪽으로 짐 보관소가 크게 설치되어 있고 정면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이번 공연의 엠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망설였다.
줄의 길이로 보아 도저히 순서가 돌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먼 거리를 서둘러 온 보람이 없었다.
어슬렁어슬렁 공연장 주변을 맴돌았다.
줄을 설지 말지 고민하며 공연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동안 백팩은 서서히 어깨를 짓눌렀다.
2시간 반 동안 기차를 타고, 고작 15분쯤 지하철을 탔을 뿐인데, 몸이 벌써 신호를 보냈다.
마침 공연장 바로 옆 벤치 중에 빈자리를 발견했다.
성큼성큼 망설임 없이 걸어가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았다.
소소는 공연을 보기 전에 도저히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단 휴식.
시선을 바닥으로 던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공연장 안에서 리허설을 하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공연장의 외벽에 눈을 고정시켰다.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리허설 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하염없이 벤치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연이 시작하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하나를 포기하고 나니 시간도 여유롭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허기가 찾아왔다.
생각해보니 아침부터 서두르느라 여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지하철 역에서 공연장으로 오는 길에 상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역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다지 식욕을 일으키는 음식은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야 했다.
태양은 지치지도 않고 뜨거운 햇빛을 쏟아부었다.
열부터 식히자.
바로 눈에 띄는 큰 카페로 돌진했다.
다행히 창가에 자리가 남았다.
2인석 중 한 자리는 가방이 차지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초코 케이크를 주문했다.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쭉 들이켠 다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달아오른 피부의 열기를 식혔다.
아, 이제 살 것 같아.
역시 여름엔 실내야.
10분쯤 지나자 통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천장도 살폈다.
에어컨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휴, 전기세가 어마어마하겠네.
전력 사용량을 줄여야 한댔는데....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카페 입구에서 한 남자가 일행을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적당한 키에 호리호리하고 약간 가무잡잡했으며 사람들이 한 번 더 눈길을 줄 정도로 훈훈한 외모였다.
그는 일행을 발견했는지 한번 멈칫하더니 방향을 틀고 중앙에 있는 개방형 주방을 지나 카페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인기가 많겠는걸.
소소는 작은 포크로 초코 케이크를 입에 가져가며 생각했다.
카페 안 손님은 대부분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인 듯 보였다.
여기저기서 가수 P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지난 콘서트가 정말 환상이었다.
어제 공연도 꿈을 꾸는 듯했다.
그는 천사다.
가수의 사진을 보며 앞다투어 감탄하고, 공연 영상을 보며 황홀해하는 모습들.
아닌 척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소소는 내심 흐뭇했다.
티켓팅이 어렵기로 유명한 가수의 공연인데, 제 손으로 해냈다는 뿌듯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이번 공연에 대한 찬사로 기대감은 더 부풀어 오를 수 없을 만큼 잔뜩 부풀었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가운 커피를 다시 쭉 들이켰다.
초코 케이크를 한 입 먹고, 가방에 짓눌렸던 어깨를 번갈아가며 한쪽씩 주물렀다.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을 때,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소소를 빤히 보았다.
눈길이 부담스러워진 소소는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가 고개를 돌리며 창밖으로 옮겼다.
그는 아직 눈길을 거두지 않은 듯했다.
그의 시선이 의식되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소소는 슬그머니 그가 있는 방향을 살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소소의 고개와 몸이 조금씩 뒤로 젖혀졌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소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테이블 바로 옆으로 바짝 다가올 때까지 그는 소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금 멍하게 그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소소의 고개와 눈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쪼그리고 앉았다.
"나 알죠?"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소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느릿느릿 말을 얼버무렸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기억나는 한 지나간 인간관계를 싹 훑었다.
이렇게 짐작조차 가지 않을 때는 함께 일한 옛 아르바이트생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쩐지 낯익은 느낌은 들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뿌연 기억 때문에 뱃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소소는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게다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기도 해서 더 기억을 못 하는지도 모른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발령을 받고 매장을 옮긴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전 매장 동료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마치고 야식 겸 술을 마시다가 보고 싶다며 영상 통화를 걸어왔는데, 두 달이나 함께 일했던 아르바이트생의 얼굴과 이름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심지어 영상 통화였다.
사과는 했지만 미안함이 마음 한편에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런데 본거지도 아니고 서울에서 우연히 함께 일한 아르바이트생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어......."
소소는 시간을 끌었다.
일단 아는 척을 할까?
아니야,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했는지도 몰라.
"진짜 기억 안 나요?"
조금 서운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7년 뒤에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엇!"
"이제 기억나요?"
"음……."
"와, 저 C에요. 매님."
'매님'이라는 말을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소소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보통 직급이 없는 사원을 '매니저'라고 불렀기 때문에 승진한 지 오래인 소소는 ‘매니저’라고 불릴 일이 지난 몇 년간 없었다.
게다가 '매님'은 일반적인 호칭이 아니었다.
소소는 그의 말을 되뇌었다.
"아-."
그가 누군지 드디어 확실하게 떠올랐다.
"여전하시네요."
"뭐가 여전해?"
"진짜 그때 그대로예요."
좋은 뜻인지 아닌지 생각하며 어딘가 장난기 어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때보다 성숙한 느낌이 물씬 나지만 완벽하게 C 군임을 인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