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밤.
버스 정류장에서 30m 정도 떨어진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쳤다.
집으로 가려면 이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지만 소소는 조금 걷기로 했다.
큰 슈퍼마켓을 지나고, 편의점을 지나고, 문 닫힌 빵집을 지나고, 신호등이 없는 2차선 건널목을 지나 하천변 산책로로 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쳇, 누구는 엄마 없나? 고작 피자 하나 사주면서 그렇게 생색을 내다니.
진짜로 딱딱했는지 아닌지 알게 뭐람.
‘딱딱하다’의 기준은 뭐야.
억울함이 북받쳐 올랐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산책로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기구로 운동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는 사람, 사색에 빠져 느리게 걷는 사람, 팔을 앞뒤로 흔들며 빠르게 걷는 사람, 상의를 벗고 달리는 사람, 반려 동물과 산책하는 사람 등등.
소소는 하류 방향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빠르게 걸을 여력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공원은 소소가 재입사를 하기 전까지 거의 매일 산책하던 곳이다.
왼쪽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오른쪽 둑 위로는 벚나무가 환하게 조명을 받고 서 있다.
봄이면 양쪽 둑을 따라 길게 연분홍 벚꽃이 만개하고 바람에 흩날려 꽃비를 뿌렸다.
그럴 때면 소소의 마음도 꽃잎에 실려 함께 날아다녔다.
벚나무 아래로는 철마다 새로운 꽃을 알록달록 예쁘게 심어 놓았는데, 지금은 색색이 국화꽃이 동글동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소소는 아직 다 피지 않은 국화의 꽃봉오리를 보며 ‘활짝 피면 예쁘겠다. 엄마가 좋아하겠네.’ 하고 생각했다.
청보리밭, 유채꽃밭, 코스모스 밭 옆을 걸으며 환히 웃던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 딸이 애써 사준 음식이 기대에 못 미쳐 실망했다면 엄마가 속상할만하다.
딸이 힘들게 번 돈이었을 테니.
딸도 엄마의 불평에 마음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소중한 식사 시간을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망쳐 버렸다는 생각에.
그렇다면 그녀가 던진 폭언을 어느 정도 감안해 주어야 할까.
이제 막 환기가 되려던 머릿속이 다시 탁해졌다.
덩달아 가슴도 답답해졌다.
소소는 빠르게 걸었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도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지만 던져진 그 감정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 역시 상당한 감정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상대는 알지 못하겠지만.
비수는 안으로 향하든 바깥으로 향하든, 얼마나 날카로운지와는 상관없이, 크고 작은 상처를 낸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그냥 이대로 잠시만 사라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소소는 발길을 돌렸다.
벤치는 하나같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자리했다.
LED 가로등은 눈이 부시게 밝았다.
하나 둘 벤치를 지나쳤다.
그저 걷다 보니 고장 난 가로등 아래 관목에 파묻힌 나무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곧장 그곳으로 가 앉았다.
소소는 잠시 어둠에 몸을 숨겼다.
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의 수면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다시 상념에 빠지려는 순간, 소소 옆에 그녀가 앉았다.
소소와 그녀는 가만히 반짝이는 윤슬만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른다.
이 정도면 충분해, 하는 느낌이 들었다.
소소는 고개를 돌려 나란히 앉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좋은 하루가 되진 못했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냐.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는 마.
너의 노고는 내가 잊지 않을게.
이제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날 떠나.
무거운 육신은 내게 맡기고 넌 한 점 바람이 되는 거야.
잘 가.
소소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한 줄기 바람이 소소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열기가 식어버린 몸에 한기가 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막 지났다.
마침 귀에 꽂힌 에어팟에서는 조니 하트만이 부른 <In the wee small hours of the morning>이 흘러나왔다.
이틀 뒤, 출근한 소소는 뜻밖의 결말을 맞이했다.
“소소, 그거 결국 환불해줬다.”
“환불이요?”
“응, 어제 또 한바탕 난리 쳐서 그냥 환불해줬어.”
“진짜요? 다 먹고 전화 온 거였는데…….”
“진짜?”
“네…….”
소소는 도도에게 그때의 상황을 더 상세히 말해주었다.
“딸이 엄마한테 보낸 거였어? 엄마 밥 사주면서 그 난리를 친 거야?”
“……네.”
“어휴, 그 여자는 언젠가 다 되돌려 받게 될 거야.”
소소와 도도는 평소 서로의 일상을 전하듯 아무렇지 않게 대화했다.
사건은 남고 감정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