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4

by 아무




굴뚝 위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가와 담은 음식 준비로 분주했고, 신은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똑똑.

인기척을 듣지 못한 사가 대신 신이 문을 열었다.

“으음, 맛있는 냄새.”

드레스 차림의 이든이 개구쟁이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녀를 따라 소녀가 발걸음을 급히 옮기려 하자 신이 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었다.

사뿐한 신의 걸음걸이에 소녀도 덩달아 내딛는 발걸음이 조신해졌다.

소녀가 주방에 들어서자 바삐 움직이던 사가와 담의 손이 멈추었다.

“어머, 귀여워라.”

“이야, 아리따운 숙녀분들, 마침맞게 잘 왔어.“

소녀는 쑥스러워 그저 웃었다.

“이제 막 음식 준비를 끝낸 참이야. 조금만 기다려 주겠어?“

담이 양해를 구하고 사용한 주방 기구를 서둘러 정리했다.

사가는 벌써 주변 정리를 마치고 주방을 빠져나가며 외쳤다.

“이든, 마실 것만 준비해 줘. 나도 얼른 옷 갈아입고 올게.“

톡, 톡, 톡, 톡.

계단을 오르는 사가의 발소리가 가볍다.

“그럼, 나도 잠시 실례할게.”

담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언제 갈아입었는지 이미 옷이 바뀐 신은 여전히 주방에 남아 이든을 도왔다.

소녀도 이든을 도와 연회장으로 물 잔을 날랐다.

“우와.”

연회장 가운데에 놓인 기다란 식탁 위에는 구운 가지와 호박, 도미 조림, 얇게 저며 부친 소고기, 화전, 송이산적, 어채 등이 만찬에 걸맞게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소녀는 무척이나 놀랐다.

나라님이라도 오시는 걸까.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나 많은 음식을 준비하다니.

마을 잔치 때도 보지 못한 귀한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커다란 접시 위에 소복이 담겼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다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사가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소녀는 이곳에 온 뒤로 온통 놀랄 일 투성이었다.

그러나 검붉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사가의 모습을 보았을 때가, 어쩌면 소녀에게는 가장 놀라운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근사해요.“

소녀가 넋이 나간 채로 말했다.

“후훗, 고마워. 배 고프지? 어서 앉자.”

오늘 만찬의 주최자인 사가는 식탁의 상석으로 가 앉았다.

소녀도 이든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고, 드디어 호화로운 만찬이 시작되었다.

식사는 즐거웠다.

모두가 사가의 음식솜씨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고, 긴 시간 동안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참으로 오랜만에 근심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동안, 소녀가 내면에 꼭꼭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마구 뒤섞이며 꿈틀거렸다.

그중에서도 이따금 서글픔이 울컥 치솟아 눈물이 맺히기도 하였으나 꾹 참았다.

세 사람은 어렴풋이 소녀의 감정을 눈치챘지만 못 본 체했다.

소녀가 제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다스릴 수 있도록 가만히 지켜봐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신과 함께였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만난 까닭에 조금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사람들이야. 궁금한 게 있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하도록 해. 분명 도움을 줄 거야.“

신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소녀의 귀에 닿았다.

“맞아요. 좋은 사람들 같아요. 물론 백귀님도요. 그렇지만 성가시게 굴지 않을래요. 오늘 일만으로도 도움은 충분해요. 정말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어요.“

소녀가 밝게 웃었다.

“성가시다니, 그렇지 않아.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크고 작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어. 그게 어떠한 형태이든. 그러니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다면 꼭 신호라도 주면 좋겠어. 그럼 우린 언제든 네게 도움을 줄 거야.“

신이 조곤조곤 말하자, 지난밤부터 겪었던 많은 일로 들떴던 소녀의 여러 감정이 잠잠히 가라앉았다.

“언제든?”

“응, 언제든.”

“무슨 일이든?”

“응, 무슨 일이든.”

“약속할 수 있나요?”

“물론. 약속할게.”

“하늘에 맹세코?“

“맹세하지.”

“좋아요. 믿어 볼 게요.”

소녀가 고개를 치켜들고 신과 눈을 맞췄다.

신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걸렸다.

소녀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데리고 와 줘서.”

“내가 데리고 온 게 아냐. 네가 온 거지.”

“그렇지만…….”

“네가 선택한 길이야. 난 그저 길잡이일 뿐이고.“

신이 발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고단할 텐데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어.“

어느새 소녀의 집이 눈앞에 보였다.

담장도 뚫지 않고 그저 신을 따라 오솔길을 조금 걸었을 뿐인데 집에 다다랐다.

소녀는 문 앞에서 신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고 집 안으로 사라졌다.

신은 소녀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소녀를 지켜보았다.

소녀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었으나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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