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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회상

쓸모없음의 쓸모

by sleeping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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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나를 살려준 분들에 대한 감사함이 먼저 생각났다. 사고가 났던 그날, 모든 순간이 위기였고, 모든 만남이 생명줄이었다.


파도는 예고 없이 덮쳤다. 따뜻한 바다에서 여유를 즐기던 나는 순식간에 거대한 물벽에 휩쓸려 의식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다. 다행히도 해변으로 밀려왔고, 그때부터 내 생존은 하나의 연쇄적인 도움으로 이어졌다.

돌이켜보니, 내 생명을 구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해변에서 나를 발견하고 끝까지 도와준 한국 아주머니의 '오지랖', 그리고 병원에서 모든 걸 해결해준 그의 '터프함'. 평소라면 부담스럽고 거북했을 그런 성격들이, 위기 상황에서는 내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오해한 사람들의 성격이나 태도에 대한 생각이었다. 겉으로 예의바르고 태도도 공손하지만 곤경에 처한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말은 번지르하고 멋져보여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태도나 말이 투박해도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도 있다. ‘책을 겉 표지로 평가하지 말라’는 서양 격언은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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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중국 역사 속 '맹상군의 일화'가 떠올랐다. 전국시대 명재상이었던 맹상군은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렸는데, 대부분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개 짖는 소리를, 어떤 이는 닭 우는 소리를 잘 낼 뿐이었다.



맹상군은 한때 정치적 음모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고향인 초나라로 도망치려 했다. 밤중에 국경 성문에 갇혔는데, 성문은 새벽에 닭이 울어야만 열리는 규정이 있었다. 모두가 절망한 순간, 식객 중 한 명이 나섰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닭 울음소리를 흉내 냈고, 병사들은 새벽이 온 줄 착각해 문을 열었다. 맹상군은 그 기지를 빌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쓸모없어 보이는 재주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기 쉽다. 나 또한 그러했지만. 하지만 맹상군은 대부분의 식객들이 밥과 술만 축낼 뿐인데도 그들을 나무라지 않고 후하게 대접했고, 결국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쓸모없어 보이던' 재주 덕에 살아남았다. 평상시 동물 울음소리가 무엇에 필요하겠는가?



이제 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는 것을. 어떤 성격도, 어떤 재주도 그 자체로 오류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때와 장소가 맞지 않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주변의 대부분의 인맥이 소용없어 보이고 재주 또한 별 볼 일 없어 보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만나는 모든 인연을 모두 살뜰히 챙길 수는 없겠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는 있다. 그들과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 만남의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대하자. 그 진심은 언젠가 나에게로 돌아올 테니까.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이러한 진리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어렸을 때는 이러한 지혜를 터득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의미 없는 건 아니다. 이 나이에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남은 생은 넉넉하게 품어주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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