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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본 풍경

by sleepingwisdom

죽음의 문턱에서 본 풍경


✳✴✵

피 냄새가 먼저 왔다. 코끝을 스치는 철 비린내와 함께 희미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무언가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 어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바르르 떨릴 뿐이었다.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거웠지만 간신히 떠보니, 천장에 낡은 형광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여기는 중환자실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 유리벽이 보이고, 그 너머로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관찰병실. 그제야 기억이 돌아왔다. 중환자실은 보호자가 들어올 수 없지만, 관찰병실은 일반 병실이면서도 의사와 간호사가 계속 상주하며 여러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 오히려 더 나은 면이 있었다.


중환자실은 불편하고 의사소통도 어려웠으니, 외국인인 나에게는 일반 병실이 훨씬 나았다. 물론 정말 응급할 경우 의사가 바로 출동할 수 있는 구조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배 위로 두꺼운 붕대가 층층이 감겨있었다. 하얀 거즈 사이로 스며든 붉은 자국들이 꽃무늬처럼 번져있었다. 수술을 했구나. 언제? 얼마나 오래? 숨을 들이마시려 하니 갈비뼈가 아파왔다. 양옆구리에서 뭔가 축축한 것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투명한 튜브 두 개가 몸에서 나와 피 주머니로 연결되어 있었다. 주머니 안은 검붉은 액체로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피를..."

코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또 다른 가는 튜브가 콧구멍을 타고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목과 팔뚝 곳곳에는 바늘들이 꽂혀있었고, 여러 개의 링거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살아있었다.



한국의 병원과 베트남 병원은 시설도 달랐지만 문화도 달랐다.

중환자실 문 앞에는 환자 가족들이 돗자리를 펴고 누워있었다. 며칠째 집에도 못 가고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보호자들의 밖에서 환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문 옆에 길게 돗자리 행렬을 이루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중환자실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냥 불빛만 밝고 시설은 거의 옛날 창고를 개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위생적이거나 특별한 것을 갖춘 느낌은 없었다. 입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경호 시설도 미약했다. 그냥 미닫이문 하나만 열면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일반 병실도 마찬가지였다. 침대는 환자 것이고, 보호자들은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잤다. 때로는 복도에서 자기도 했다. 밤에 화장실 가려면 조심조심 사람들을 피해 걸어야 했다. 더운 날씨였지만 얇은 돗자리 한 장이면 충분했다. 추워지면 대나무 돗자리를 두 장 깔기도 했다. 각자도생의 세계였지만, 묘하게 질서가 있었다


.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내와 나 같은 한국 사람뿐이었다.

내게는 특별한 대우가 있었다. 김사장님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아내가 중환자실에 두 번이나 면회를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였다. 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층에는 가끔 쥐가 다녔다. 병실에는 곤충들과 작은 도마뱀이 나타나기도 했다. 구석구석 거미줄이 있었고 먼지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자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명치에서 치골까지, 거의 60센티미터를 개복했다고 했다. 요추 3번 척추가 부서지면서 뼈 조각들이 대동맥을 건드렸고, 그 바람에 대동맥이 파열되어 내부 출혈이 심했다는 것이다. 출혈량이 많았고 장시간의 수술이었다.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 의식이 돌아오면 살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복부 전체를 개복한 것은 복부가 피로 가득차 있어서 어느 곳이 파열되었는지 초음파로 찾을 수 없어서 급하게 응급수술을 들어가면서 대동맥 파열된 곳을 찾기 위한 응급조치였다.



수술 후에도 피는 계속 나왔다. 눈으로 보기에도 몇 리터는 넘게 흘린 것 같았다. 빨간 피, 투명한 액체가 주머니를 가득 채웠다. 간호사들이 몇 번이고 그 큰 주머니를 비워냈다. 총 열흘 넘게 배 속 남은 피를 뽑아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의 양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일주일 정도 어떤 것은 열흘 정도 지나서 관을 배에서 빼낼 수 있었다.



소변줄은 의식이 돌아온 다음 날 바로 뺐다. 스스로 연습하라고 했다. 소변 처리를 위해 기저귀나 소변통을 사용했다. 코의 튜브는 나흘째 되던 날, 호치민으로 후송될 때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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