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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끝에서 4(생환체험기시리즈)

파도가 되다

by sleepingwisdom

파도가 되다


'살아야 한다.'

그 목소리는 내가 낸 게 아니었다. 몸 깊숙한 곳에서, 세포 하나하나에서 올라오는 외침이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라는 절박함이 깊은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냥 무의식의 거대한 명령 같은 외침이었다.



파도 하나가 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해변이 보였다. 아주 분명히 보였다.

회색빛 파도가 나를 품에 안듯 감쌌다가 다시 삼켜버렸다.

차가운 바닷물이 코와 입을 가득 채웠다.

숨을 참았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물의 압력 속에서도 파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 파도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언제 놓아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더 물속에 있지 않았다. 파도 자체가 되어있었다.

파도의 움직임이 곧 내 움직임이었다.

파도의 호흡이 곧 내 호흡이었다.

경계가 사라졌다. 나와 바다, 나와 파도 사이의 벽이 녹아내렸다.

깊은 바다의 울림이 내 가슴을 관통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내 심장박동과 하나가 되었다.




내가 순간적으로 파도가 된 느낌은 글이나 말로 설명하기 참으로 힘든 일이다.

나는 파도처럼 유연했고 강인했으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웠다.

엄청난 힘 자체가 되어서 이리저리 유랑했다.

지구와 달의 중력의 힘이 내 내부로 들어와 밀고 당기며 나를 해체해 나갔다.

나는 모든 감각이 사라지자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너무나 평온했다. 모든 무게와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죽음이구나!’ ‘나는 사라지고 있구나!’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의식은 더욱 명료해졌다.



그리고 그 평온함을 깨는 빛 알갱이가 눈을 때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자!’

다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무의식은 삶을 갈망하고 있었다.


몸은 분명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숨쉬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러한 일체감을 느껴본 것도 신기하다.

실제로 내가 해변에 도달했을 때는 거의 초주검 상태였다.

입안에는 거칠고 까끌까끌한 모래 알갱이들이 혀를 짓눌렀고, 짠 바닷물의 쓴맛이 목구멍을 태웠다.

많은 양의 모래를 삼킨 것이 확실하다.

수술 후 거의 일주일 이상 모래를 게우듯 뱉어낸 듯하다.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도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많은 물과 모래를 삼키고 파도를 얻어맞고 해변바닥에 나뒹굴고 했던 일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평온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파도의 리듬에 집중하며 내 호흡을 맞추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워낙 많은 출혈과 골절, 그리고 탈진과 그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미루어 볼 때 죽기 직전에 초감각 상태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죽음 직전에, 이상하게도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과 물아일체를 이루는 느낌을 거기서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짧은 순간순간 고통과 평온함이 함께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의식이라는 것은 계속 있었고 명료함을 경험하고 있었다.



마지막 거대한 파도가 나를 집어삼켰다.

몸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 안에 피 맛이 돌았다.

오른쪽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이번에는 정말 오래 참아야 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파도는 마치 거대한 야수처럼 포효했다.

그 울음소리가 내 두개골을 진동시켰다.



그런데 그 파도가 나를 놓아준 곳은... 모래였다.

거친 모래가 등과 팔을 긁으며 현실을 각인시켰다.

파도가 발목을 잡아당겼지만, 이제는 모래를 움켜쥘 수 있었다.

해변이었다. 나는 파도가 되어 여기까지 왔다.



파도가 다시 밀려왔다.

이번엔 그 물살에 내 몸이 휘청거리면서 해변 쪽으로 가까워졌다.

기어 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과 다리는 이미 지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상 상태라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



왼쪽 어깨로 몸을 기운 채, 겨우겨우 해변에 닿을 수 있었다.

힘겹게 팔을 뻗어 해변으로 기어서 올라갔다.

정말 내 힘으로 올라갔는지, 파도가 데려다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왼쪽 어깨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마도 나는 왼쪽으로 누운 채 왼쪽 어깨로 기어 나왔다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그 상황은 희미한 기억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어느새 해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 머릿속에서 또 다른 공포가 떠올랐다.

내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정말 해변에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상상하는 것일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물을 많이 먹은 상태에서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물속에서 혼신의 힘을 쓴 터라 기력도 없어 정신이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사고는 영화나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직접 겪을 수 없는 경험이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증과 숨 쉴 수 없는 고통, 그리고 모래와 물로 가려진 흐릿하고 까끌거리는 시야가 이것이 현실임을 간간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 시간은 실제로 몇 분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라 시간이 매우 느리게 지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파도가 나를 덮쳐온 일

물속에서 나뒹굴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진동

물이 덮치며 물과 모래가 폐와 위장 깊숙이 들어간 일

파도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부유한 일

파도가 되어 평온함과 자유로움을 느낀 일

빛이 나를 깨워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본능 혹은 무의식의 울림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슬로모션의 영화 장면처럼 오래 지속되었다.




시간이 늘어난다라는 개념을 감각으로 체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는 정지되어 있고 그 사이는 영원한 듯 느껴진다.

통증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고 명료한 의식만이 존재했다.

내가 초능력을 가진 착각에 빠져들었다.

환각과 현실을 오가며 내 정신을 부여잡고 해변가 모래사장에 도달한 것이 기적이었다.


몇 번 파도가 몰아쳤지만 운 좋게 큰 파도는 오지 않았다.

파도가 와도 내 발과 다리 정도에만 물이 닿을 뿐이었다.




***

내가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 기적 같았다.

나를 살린 것은 결국 파도였고, 나를 죽이려 했던 것도 바로 그 파도였다.

모순처럼 느껴졌다.

그 힘겨운 싸움 속에서 파도는 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다.

바다는 무서운 존재였고, 동시에 나를 구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를 죽음에 가까이 몰고 간 것도 파도였고, 동시에 나를 살려낸 것도 파도였다.

삶과 죽음이 한순간이었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결코 멀리 있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었다.

죽었어도 이상할 것 없는 큰 사고였다.

그 경험이 얼마나 생생하고 동시에 신비로운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



우선은 해안가에 다다르자 안도감과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다.

이러다가는 통증으로 죽을 것 같았다.

‘헬프 플리즈 헬프’ 본능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파도의 끝에서’ 시리즈]는 실화 기반 생환 체험기로, 매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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