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회고록)

추억이야기

by sleepingwisdom

소양강의 기억 - 1984년 여름

*사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

감성시버전


물의 노래


그해 여름, 하늘이 무너지는 듯 쏟아진 빗줄기 사이로

소양강이 울었다. 깊고 묵직한, 대지를 흔드는 울음소리였다.


어머니의 손은 떨렸다.

판잣집 한 채가 전부인 삶 앞에서

강물은 무정하게 밀려왔고

십 년의 땀방울이 스며든 나무벽을

한순간에 집어삼키려 했다.


---


눈물의 무게


그분이 우시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온몸으로 살아내셨던 분,

등 굽어가며 하루를 견뎌내시던 분이

그날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조용히, 아주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 투명한 방울들이

지금도 내 가슴 한구석에

이슬처럼 맺혀 있다.


---


#아이의 시간


열 살 나이엔 홍수도 축제였다.

유포리 대피소는 아이들에겐 소풍지요,

검은 타이어 튜브는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송어들이 강물에 흩어져 헤엄치고

우리는 그 차가운 물결 속에서

죽음을 모른 채 웃음을 터뜨렸다.

거센 급류가 스릴이었고

위험이 곧 재미였던 시절.


---


북녘의 선물


장마가 그치고 학교 운동장에

북한의 쌀포대가 쌓였다.

담요와 함께 도착한

형제의 마음.


그때는 몰랐다,

그런 일이 꿈같은 기억이 될 줄을.

분단의 아픔보다

사람의 온기가 먼저 전해지던

그 소중한 순간들을.


---


시간이 남긴 것


어머니는 이제 없고

판잣집도 사라졌지만

소양강은 여전히 흐른다.


그날의 홍수가 가르쳐준 것:

삶이란 받아들이는 것,

아이의 순수함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물이 할퀴고 간 자리에

새로운 씨앗을 심는 것.



*긍정이란 상황을 낙관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품어 안는 마음.*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







에세이버전


약 40년 전의 이야기이다. 필자가 아마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를 부르는 80년대 초의 이야기이다. 84년도로 기억한다. 나는 춘천 소양강 근처에 살았다. 그 시절에 장마철에 무지막지한 비가 지금처럼 내렸다.



갑자기 대피 명령이 내렸다. 소강댐의 방류량이 많아져서 강뚝이 다 무너지고 휩쓸려 집앞 바로 밑에 까지 물이찼다. 우리집보다 아랫집들 몇 몇은 물이 벌써 찼다. 우리는 짐을 쌀 시간도 없이 유포리라는 지금은 사과로 유명한 곳으로 피난을 갔다. 그쪽은 산에 가깝고 지대가 높아 안전했다.



우리가족이라고 해봤자, 어머님과 필자 둘이다. 늙은 나이에 나를 낳으신 홀어머니는 혼자 생계를 책임지셨다. 살림살이를 모두 잃을 지경이 아까워오자 어머니는 홀연히 하늘을 바라보셨다.

갖은 고생으로 겨우 허름한 나무로 지은 판잣집을 얻으셨는데 그것마자 침수를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머니가 우시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강인하셨던 분이다. 온 몸으로 살아내신 분이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 무게가 지금도 가슴을 저민다.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되셨지만.



10살 밖에 안 된 필자는 걱정이 없었다. 철이 없었다. 홍수의 개념이 없었다.

일주일간 유포리 마을회관같은 대피소에 머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텃밭은 유실되고 집은 토방까지만 물이 차셔 그나마 살림도구들을 씻어내는 정도에서 마무리됐다. 인근 송어 양식장은 모두 망가져서 많은 물고기가 강으로 방출됐다. 솜씨가 좋은 친구들은 팔뚝 만한 송어들을 잡고 좋아했다.



나는 물고기잡는데는 재주가 없었다. 어른들은 수해복구에 한창인데 아이들은 역시나 철이 없다. 필자도 친구와 검은 타이어 튜브를 타고 그 위험한 강가에 나가 수영을 했다. 집이 소양강이라서 여름마다 수영을 해서 거친 물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끔 또래 아이들이 익사사고를 당해서 유명을 달리한 경우도 있다. 수영미숙이 아니라 물이 차가워서 심장마비로 죽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장마가 끝나도 산에서 물이 내려오니 수량이 많고 물살이 거세다. 그런것도 아이들에겐 재미다. 급류를 탄다고 좋아하고 스릴을 즐기던때가 있었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인데 아이들에게는 놀이도 비춰지곤 했다.



지금처럼 게임이나 유투브 시청한던 시기아 아니다. 시골의 놀거리는 여름에는 물놀이. 겨울에는 지푸라기 넣은 푸대로 언덕에서 썰매를 타는게 최고 놀이였다. 정말 야생의 시대를 운좋게 관통해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장마가끝나고 학교에 돌아가니 북한에서 원조가 도착했다. 북한에서 보내준 쌀과 담뇨등을 받아 집에 돌아간 기억이 있다. 북하에서 원조를 받았던 시절도 있으니 꿈같은 이야기다.



이번 홍수로 피해를 본 많은 분들을에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겠지만 아이와 같은 철없는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기도 하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놀 생각만 하는 철없는 아이의 순수함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긍정의 마음은 상황을 낙관적으로본다는 말이 아니다. 긍정이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떤 버전이 더 나은가요?

댓글부탁드려요.


**이번 홍수로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함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