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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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eepingwisdom

왜곡된 시선의 지배

지도와 색깔이 만든 서구 중심의 세계관


"세상은 우리가 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로 믿을 뿐이다."


지도 위에 새겨진 권력의 흔적

교실 벽에 걸린 세계지도에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크기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해 보인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이 지도는 16세기 네덜란드의 항해자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적도에서 멀어질수록 면적이 과장되는 이 투영법은 북반구를 실제보다 크게 왜곡한다.




실제 지구 표면에서 각 대륙이 차지하는 비율은 다음과 같다. 아시아가 33%로 가장 크고, 아프리카가 22%, 북미가 18%, 남미가 13%, 남극이 9%, 유럽이 7%, 오세아니아가 5%다. 아프리카는 유럽보다 정확히 3배 이상 크다.




그런데 메르카토르 지도에서는 이 비율이 완전히 뒤바뀐다. 그린란드는 아프리카와 비슷한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14분의 1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아프리카보다 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70% 정도다. 유럽은 아프리카의 절반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3분의 1도 안 된다.



이런 왜곡이 500년 넘게 지속되면서 세계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었다. 54개국 13억 명의 인구를 가진 아프리카는 '여러 작은 나라들'로, 27개국 7억 명의 유럽은 '거대한 문명권'으로 여겨졌다. 지도가 만든 시각적 환상이 지정학적 현실 인식을 지배한 것이다.




살색이라는 명명법의 권력

크레용 상자의 '살색'은 #FDBCB4 정도의 연한 베이지색이다. 전 세계 80억 인구 중에서 이 색조와 유사한 피부를 가진 사람은 약 16억 명, 전체의 20% 정도다. 나머지 80%는 이보다 어둡거나 다른 색조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색깔이 '사람의 기본 피부색'으로 명명되었다. 한국, 일본, 중국은 물론 아프리카와 남미의 많은 국가에서도 이 명명법이 통용되었다. 소수의 피부색이 다수를 대표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색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기준을 설정하는 권력의 문제다. 20%가 80%의 기준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위계가 형성되었다. 백인 아이들은 자신의 피부가 '정상'이라고 배웠고, 다른 모든 아이들은 자신을 '특별한 경우'로 인식하게 되었다.




역사 서술의 편향된 시선

세계사 교과서에서 다루는 내용을 분석하면 명확한 편향이 드러난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시민혁명, 제국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 주요 서술의 90% 이상이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시아는 전체 육지의 33%를 차지하고 45억 명이 거주하는 최대 대륙이지만, 중국의 통일 왕조와 인도의 무굴 제국 정도만 간략히 언급된다. 이슬람 문명의 과학적 성취, 동남아시아의 해상 제국들, 아프리카 내륙의 고대 왕국들은 대부분 생략된다.



이런 서술 방식은 유럽을 기준으로 '근대성'을 정의한다. 유럽의 경험이 인류 역사의 주류가 되고, 다른 모든 문명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전근대적' 존재로 분류된다. 하지만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 된 것은 문명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15세기 이후 식민지 확장을 통한 자본 집중의 결과였다.



시각적 헤게모니의 일상화

지도, 색깔, 역사 서술이 결합되면서 강력한 시각적 헤게모니가 형성되었다. 이 헤게모니는 강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누구도 총을 들이대며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매일 보는 지도가 그렇게 생겼을 뿐이다.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세계 뉴스의 비중을 보면 이 편향이 더욱 명확해진다. 유럽과 북미의 소식이 60% 이상을 차지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주로 재난, 분쟁, 질병의 맥락에서만 등장한다. 57억 명이 거주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일상적 삶과 문화적 성취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은 80% 이상이 백인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대부분 서구인이다. 이런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조연인지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이 형성된다.



의식 구조의 식민화

이런 과정을 통해 의식 구조 자체가 서구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백인의 몸을 정상으로, 유럽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구의 문화를 표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직접적인 강요 없이도 이루어지는 내재화 과정이다.



가장 교묘한 점은 이 과정에서 비서구 지역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위계화된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백인과 비교해서 '다른' 존재가 되고, 아프리카인과 비교해서는 '더 발전된' 존재가 된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도 이런 위계가 재생산된다. 서구의 작품은 '예술'로, 아프리카의 전통 조각품은 '민속품'으로 분류된다. 복잡하고 정교한 아프리카 문명은 '부족 사회'로 단순화되고,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아시아 철학은 '동양 사상' 정도로 주변화된다.



숫자로 드러나는 현실

통계는 이런 왜곡의 규모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아프리카는 지구 육지면적의 22%를 차지하지만 세계 GDP의 3%만을 생산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수치 자체가 서구 중심의 경제 지표로 측정된 결과다. 전통적 경제 활동, 지하 경제, 비공식 부문은 대부분 통계에서 누락된다.



인구 비율과 미디어 노출 비율의 격차도 극명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는 세계 인구의 77%가 거주하지만, 서구 미디어에서 이들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도 안 된다. 반대로 유럽과 북미는 인구의 16%에 불과하지만 미디어 노출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왜곡된 프레임의 지속

이런 왜곡은 자기강화적 성격을 갖는다. 한번 형성된 인식의 틀은 새로운 정보를 그 틀에 맞게 해석하게 만든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긍정적 변화는 주목받지 못하고, 부정적 사건은 과도하게 부각된다. 유럽의 문제는 일시적 어려움으로, 아프리카의 문제는 구조적 한계로 해석된다.



교육 시스템도 이런 편향을 재생산한다. 세계사는 여전히 유럽사 중심으로 구성되고, 지리 교육에서는 메르카토르 지도가 표준으로 사용된다. 미술 교육에서는 서구의 고전 작품이 '명작'으로 가르쳐지고, 문학 교육에서는 서구의 고전이 '세계 문학'의 정전으로 다뤄진다.



진실을 가리는 투명한 벽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모든 왜곡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포장된다는 점이다. 지도는 과학적 도구로, 역사는 사실의 기록으로, 문화적 기준은 보편적 가치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특정한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왜곡된 프레임은 진실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는다. 대신 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보이게 만든다. 투명한 유리창 같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색깔로 물들어 있는 렌즈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교묘하고 지속적이다.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관계가 만들어낸 세상이다. 22%와 7%의 차이가 뒤바뀌고, 20%의 피부색이 80%의 기준이 되고, 16%의 인구가 77%의 역사를 대표하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물려받은 시각적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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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의 침묵 속엔 아직 호랑이의 숨결이 살아 있다.
『신이 오지 않아도 산은 들었다』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양심의 소리를 따라, 삶의 방향을 묻는 한 사람의 기록이다.
그림과 문장이 조용히 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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