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어렸을 적 나는 시골 골목을 헤매며 울곤 했다.
1980년대 초, 시골의 초여름밤은 길고 어두웠다. 엄마는 남의 밭일을 하고 돌아오셨다. 하루 종일 품을 팔아 받은 돈은 1500원. 그 시절, 하루 품삯이 닭 한 마리 값이었다. 엄마가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집 안의 적막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무서움을 달래려 골목길을 서성이다가, 어느새 전봇대 아래서 눈을 붙이곤 했다. 그러면 동네 방앗간에서 머슴살이하던 ‘바보 아저씨’가 나타났다. 아저씨는 말없이 나를 업어 집으로 데려다 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바보라 불렸지만, 그 등에 실린 온기는 내 마음을 잠재웠다.
한 달에 한 번, 많아야 두 번. 엄마는 한밤중에 나를 깨웠다. “일어나, 통닭 먹자.”
그 시절 통닭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호사였다. 비닐에 담긴 뜨끈한 닭고기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의 위장은 준비가 덜 됐다. 저녁을 굶었더라도, 비몽사몽 속에서 맛은 반감됐다. 그래도 나는 맛있게 먹는 척을 했다. 엄마의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몸이 붓고 속이 더부룩했지만, 그 밤의 닭고기 냄새와 엄마의 표정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결핍감’이 이후의 내 삶을 밀어 올릴 줄은.
부족함은 나를 움직였다. 두려움을 견디게 했고,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게 했다. 돌이켜 보면 문명, 종교, 과학도 이 결핍에서 비롯됐다. 인간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세상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계발서의 수많은 문장도 결국은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 그것은 내가 채우지 못한 무엇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결핍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원동력이다. 문제는, 그 결핍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결핍에도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은 나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내 안에 깊이 새겨진, 나만의 결핍.
또 어떤 것은 남의 욕망을 빌려온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목표가 나를 조급하게 한다. 문제는 후자다. 남의 욕구를 따라가다 보면, 나는 내가 무엇을 진짜로 원하는지 잊는다. 남이 만든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도, 이상하게 허전하다. 아무리 채워도 목마름은 가시지 않고, 그 공허함은 때로 의무감이나 강박으로 변한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남이 만든 ‘결핍의 그림자’일 때, 삶은 나를 갉아먹는다.
하지만 내 안에서 솟아난 결핍을 바라보고, 그것을 나만의 속도로 채워갈 때, 결핍은 함정이 아니라 발판이 된다.
부족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빈틈이 삶을 흘러가게 한다. 강이 흐르는 이유가 강바닥의 낮음에 있듯이, 사람도 빈 곳이 있기에 움직인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의 냄새와 감촉을 기억한다.
초여름밤 골목길의 따스한 공기, 전봇대 아래 스며드는 졸음, 바보 아저씨의 등 위에서 느낀 심장 박동, 그리고 엄마가 사 온 뜨끈한 통닭의 향기. 그 모든 것은 나의 결핍을 단단하게 만든 흔적들이다. 그리고 그 결핍은 여전히 나를 앞으로 밀어주고 있다.
결핍을 없애려는 데서만 벗어나면, 그것은 삶의 동반자가 된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때로는 잔소리를 하고 때로는 등을 떠밀며, 나를 아직 가보지 않은 길로 데려간다. 결핍이 없었다면 나는 멈췄을 것이다. 결핍이 있었기에 나는 걸었고, 넘어졌고, 다시 일어났다. 그 모든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결핍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다.
그 빈자리는 때로 고통스럽지만, 그 속에서만 피어나는 꽃이 있다.
나는 오늘도 그 꽃을 키우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