웩슬러 검사를 궁금해하는 부모님들을 위한 풀배터리 체험기
https://brunch.co.kr/@sleepyan/28에 이어서
일주일쯤 지나서 아이의 검사 결과를 받아들었다. 아이는 지능이 좋은 편이었다. 문제는 네 가지 중 한 영역, 처리 속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20점 이상이면 유의미하게 차이난다고 하는데 아이는 40점 이상 차이가 났다. 그게 왜 그런지가 웩슬러의 소검사를 통해, 또 풀배터리의 다른 검사를 통해 보였다.
아이는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다. 마무리하고 넘어가도 될 부분에서 검사자의 눈치를 보며, 계속 다시 더 잘해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속도가 느려졌던 거다. 또 아이가 불안한 상태일수록 그 격차가 커서 지능 검사의 정확도도 떨어진다고 한다.
아이는 언어, 추론, 작업기억, 처리속도 등 네 영역 중 언어와 추론이 높았고, 추론이 가장 높았다. 선생님 말로는 아이는 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더 크고 훌륭한데 밖으로 꺼내지는 결과물은 시덥잖으니, 만족이 잘 안 될 거라고 했다. 그런 부분이 타고난 기질과 작용해 불안이 높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 부분에서 나는 좀 서글퍼졌는데 이런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기가 쉽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돌아보니 아이는 어릴 때부터 말도 잘하고, 곧잘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는데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두 살 위의 누나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늘 자기는 잘하는게 없다고 했다. 우리는 늘 "니네 누나가 더 먹은 밥그릇이 몇 개냐"며 웃었지만, 이 녀석은 진지했다. 타고나길 자기에 대한 만족감이 적게 설계됐다니, 나는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또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 그걸 실생활에서 융통성 있게 잘 적용하지 못했다.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이 대개 장난꾸러기인데 친구는 배려하고 아껴주는 것이라고 배운 이 녀석은 선을 지키는 것 따위는 안드로메다인 저학년 남자친구들을 힘들어했다. 당시 같은 반 아이 중에 ADHD로 알려진 녀석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돌발 행동이 심했고, 이게 내 아이의 불안감을 더 자극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친구여서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관념이 그 조그만 머리 속에서 계속 충돌하니 그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부정맥처럼 보이는 신체화 증상도 보였으리라는 것이 검사자와 상담 선생님의 해석이었다.
결과적으로 검사 선생님은 아이에게 놀이치료를 권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거절을 잘 하지 못하고,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데 불편함을 많이 느끼니 놀이를 통해 아이가 그런 표현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만들어주고 그를 통해 불안을 낮춰보자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러자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검사 몇 달 전, 반 아이들을 틈날 때마다 툭툭 치고 다니는 녀석 때문에 힘들어하던 아이에게 "하지마"라고 말하는 연습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애가 "연습으로도 못하겠다"고 해서 내 속을 태웠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남에게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걸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매번 그렇게 살다가 스트레스로 터지게 둘 수는 없으니, 결국 우리는 놀이치료를 시작했다.
엄마 입장에서 보면, 놀이치료는 참 별거 없다. 진짜 노는 거다. 놀이를 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때 아이의 감정을 끌어내기도 하고, 그럴 때 적절한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게 별거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자기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지 못하는 아이는 물론 어른도 많다. 주 1회, 고작 50분짜리로 어떻게 아이를 변화시키겠나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아이는 6개월 간 놀이치료를 받았다. 초여름쯤 시작했던 놀이치료를 끝낼 무렵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슬슬 걸리기 시작하는 겨울 초입이었다. 아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통해 더 잘 알 수 있었다. 아이 치료가 끝나면 보호자도 10분 정도 상담을 하는데 처음에는 모자랐던 부모 상담 시간이 나중에는 적당해졌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내 자세도 편안해졌다. 우리가 치료를 그만둬도 될 때가 됐다는 시그널이었다. 선생님은 이제 아이와 그만 만나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고, 놀이치료가 뭔지도 모르는 9살짜리 남자애는 그저 선생님과 떨어지기가 싫었다. 가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할 때 연락하기로 허락을 받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도 아이 인생 중 가장 잘한 '사교육'이 영재교육이 아니라, 그 6개월 간의 심리치료였다고 생각할 것 같다. 아이는 그때보다 많이 자신에게 너그러워졌고, 친구들의 행동에 대한 불안감도 많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나로서는 타고난 사람의 기질은 완전히 바꿀 수 없지만, 도드라진 부분을 완화해서 아이의 불편함을 줄일 수 있다는 중요한 배움을 얻었다.
우연히 다른 전문가를 뵐 일이 있었는데 "아이는 그래도 운이 좋은 것"이라는 얘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내 아이같은 성향의 남자 아이들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내답지 못하다며 면박을 줘서 아이들이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래, 그러고보니 내 어린 시절 그런 소리들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곤 했다. 내 아이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아이 친구 엄마들에게 풀배터리 검사를 권하곤 했다. 둘째 검사 후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큰 아이도 받았다. 아이와, 아이를 대하는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예전보다는 조금씩 심리 검사나 정신과 치료 등에 의식이 변화하고 있기도 하고, 예전에는 무시됐던 심리가 우리 삶에 큰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을 궁금해하는 어른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다만 나는 풀배터리 검사를 권할 때 "웩슬러만 받으려면 안 받는게 낫다"고 얘기할 때가 많다. 사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노파심에 하는 소리다. 좋은 검사자들은 웩슬러만 받아도 아이의 기질 등에 중점을 두고 얘기해주신다고 하는데 요즘은 이를 사교육에 필요한 수치 정도로 쓰는 곳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언어가 높으면 문과, 추론이 높으면 이과 이런 식이나, 상위 몇 %까지는 영재수업을 받을 수 있고, 그 뒤는 좀 낮은 수준의 수업을 받고 그런 식으로 나눠서 '영재교육'을 하는 곳도 있다.
우리 아이의 경우 검사자는 "지능이 높다고 사교육을 밀어붙이지 마라. 이런 성향은 힘들어도 참다가 어느 순간 부러져버리는 타입이라 잘 보면서 시키셔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부정적인 자극이 에너지가 되는 친구들도 있긴 하다고 했다. 사람 기질마다 교육 방법도 다른데 지능만 가지고 아이 교육 문제를 판단하면 실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능이 그렇게 높지 않은데 부모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스카이'에 가는 친구들도 많고, 지능은 1% 안쪽인데 학교에 적응을 못해 못 다니는 아이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특히 부모들이 관심있어 하는 '영재' 아이들은 관심사가 또래 아이들이랑 다르다보니, 교우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모두가 영재를(혹은 영재를 둔 부모를) 부러워하지만, 공부를 좀 해보니, 그다지 스스로 행복해지기는 어려운 아이들이라는 생각에 이제는 옛날만큼 부럽지가 않다.
처음 아이가 힘들어했던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 다시 글로 적으면서도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도 또 생각해보면,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아이의 어려움을 알게 돼 적절한 치료를 받게 했으니 참 다행이다. 결론이 뭐냐고? 잘 쓰이기만 한다면 그 '영재 검사', 한번 받아볼만 하더라는 것.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건 필요한 결과를 외면하거나 회피할 것 같다면, 그냥 모르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검사이기도 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