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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Nov 23. 2019

멀어지는 이상과 프란시스 하

내가 작게 느껴지는 요즘엔

이 글에는 영화 <프란시스 하>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뉴욕 여행했던 시간이 그리워서 <프란시스 하>를 봤다. 사진은 브루클린의 유명한 DUMBO.


  요즘 내 안에선 '내가 뭘 해 먹고 살 수 있지'와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지'가 치열하게 부딪힌다. 열심히 산 것 같으면서도 나는 작게 느껴지는데 아무거나 되고 싶지는 않다. 뭐 그런 요지다. 이런 일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생각하다가도 그 일을 택했을 때 겪어야 할 고난, 부조리 등을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한 풀 꺾인다. 그럼 생각하는 거다. 난 눈을 꼭 감고 차악을 골라야 하나? 그러다 보면 차악이 됐든 최악이 됐든 그 자리를 쟁취하는 길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럼 내가 한없이 무능하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먼 곳에 떨어져 있다 보면 내 안부에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난 관성적으로 카카오톡에 들어가고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확인하며 사람들과 메시지를 주고 받지만, 아주 힘에 부치는 순간에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다들 잠들어 있을 시간, 이곳 시간으로 대략 오후 두시 이후, 가 되면 미친듯이 심심하고 가끔 외롭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한 심경으로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덧 일종의 습관이나 패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안부를 나누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레타 거윅이 현대무용수로 나오는 <프란시스 하>. 여담이지만 연기자는 정말 다재다능해야겠구나 생각했다 .

  여유로운 금공강 넷플릭스로 <프란시스 하>를 봤다. 예전에 보다가 존 전적이 있는 영화인데, 난 좋은 영화 보다가도 잘 자는 사람인데다가 그때 당시에 이 영화로부터 좋은 기운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도 토론토 기숙사 침대였다.) 뉴욕에 다녀오자마자 이 영화부터 생각이 났고, 시간이 좀 지나고 뉴욕이 그리워진 지금에서야 자지 않고 보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바쁘지만 정갈한 뉴욕 풍경도 다시 보고 뉴욕스러운 에너지를 얻고 싶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이 영화는 힘이 됐다. 이 말이 내 언어가 아니라서 아쉽지만, 왓챠 평을 읽다가 정말 좋은 평을 발견해서 하나 빌어 온다.


"나는 맨발로, 그저 제자리만 빙빙 도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나고보니 나는, 춤을 추고 있었다."

(이지은씨의 평이다.)


  삶에서 내가 지금 겪어야 하는 순간들이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세상이 고결하지 않으니까 나도 험한 꼴을 볼 수도 있다. 때로는 가장 친한 친구와 멀어져야 하는 순간들이 오고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오기도 한다. 인간은 때론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여태까지의 난 그런 지점들을 애써 강하게 부정해 왔던 것 같다. 언제나 타인에게 좋은 모습,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난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잘 지내고 있어야 했고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내 이상과 다른 것 같으면 끝없는 합리화와 자기세뇌가 시작되곤 했다. 그게 내가 미래에 대한 고민을 더해갔던 이유였다. 내가 합리화나 자기세뇌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될까봐 두렵다. 사람들은 내게서 멀어지고 궁극적으로 내 곁에는 아무도 없을까봐 걱정된다. 바로 어제까지 마음을 터놓았던 사람에게 경계를 세우게 될까봐 그것도 무섭다. 써 놓고 보니까 겁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 프란시스는 밝게 각종 고난을 해쳐나가지만, 사실 그 '밝음'을 걷어내고 보면 프란시스는 내가 우려하고 있는 모든 상황에 놓이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꿈은 좌절될 위기에 놓이고 친구 관계는 틀어진다. 무작정 떠난 여행지는 외롭다. 그래서 때로는 타협점을 찾기도 하고 거짓말도 한다.

  그러나 끝내 영화는 프란시스가 어떤 방식으로든 꿈을 이루고 우정을 되찾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적이지 않은 결말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쉬이 되찾을 수 없으리라 믿게 되는 어떤 것들은 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면 돌아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경험은 얼마 살지도 않은 나도 했고 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일 프란시스가 자신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가장 친한 친구와의 관계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해도 난 이 영화에서 희망을 얻었을까? 이 글을 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힘이 되는 것을 느꼈다. 프란시스를 두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캔디 같은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은데(그렇게 묘사되지도 않는다.), 이상하게 프란시스가 놓이는 상황들은 우울하면서도 명랑하게 받아들여진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프란시스가 처음에 예상한 것과 조금 다른 방식이더라도 찾아 올 것만 같고, 프란시스가 그렇다면 나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는 게 삶인가보다 싶기도 하다.


  아무튼 뉴욕에 다시 가고 싶어서 본 영화에서 내가 돌고 있는 제자리걸음이 실은 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서 기쁘다. 난 행복하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데 어느 순간에도 이런 내 소망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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