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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Dec 09. 2019

여행의 이유

교환학생 기간 중 읽어서 다행이야

사진 출처: yes24.com




  김영하의 수필들은 닮고 싶다. 처음 내가 김영하라는 작가를 접한 것은 소설이 아니라 수필집 <보다>였는데, 고교시절의 나는 그의 글쓰기에 꽤 감명을 받고 대입 자소서에 <보다>를 언급하기까지 했다. <보다>의 다른 시리즈인 <읽다>나 <말하다>도 인상깊게 읽었다. 그러고 난 뒤 그의 소설들을 읽으며 수필보다 못한 기분에 실망을 하기도 했다. (저 개인의 취향입니다.) 그런 그가 지난 4월, 또 다른 수필집을 냈다. 당연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잘 접하려 하지 않는 습관이다. 김영하는 예능 <알쓸신잡>을 통해 스타 작가가 되었고, <여행의 이유>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산처럼 쌓였다. 난 <여행의 이유> 읽기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 

  밴쿠버 여행에 엄마가 이 책을 가지고 오셨다. 여행하는 동안 읽겠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다 읽으셨는지 생각은 안 난다.) 엄마는 여행하면서 쓴 메모 등등을 책 속에 고스란히 끼워 둔 채 토론토의 내게 책을 쥐어주시고는 한국에 유유히 돌아 갔다. 토론토에 살면서도 이 책만 보면 괜히 광화문 교보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여행의 이유> 탑이 생각나서 거부감이 들어 읽지 않고 있다가, 종이책의 물성(누가 쓴 말이더라..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튼 내 언어는 아닌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서 쓴다.)이 그리워진 이제야 이 책을 다시 펴 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난 이 책을 지금 읽게 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도 김영하 작가의 사유는 잘 살아 있어서 날 끊임없이 자극했다. (나도 그런 '띠꺼운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 여행에 관한 몇 편의 글을 엮은 이 책은 '교환학생'이라는 제목을 달고 시작된 내 지난 수개월의 여행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 패전계 」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 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고향보다 서울을 더 좋아하는 나지만 학교 근처에 있으면 때로는 숨이 막히고 지루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학교의 회색빛 건물들이나 학교 냄새가 나는 강의실 및 학생회관, 질리도록 먹은 김밥. 모든 것들이 내 어깨에 짐이 되어 꽂히는 듯했다. 그나마 집에 가면 낫긴 했지만 할 일이 있을 때는 집도 집 같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고향으로의 도피를 꿈꾸지만 글쎄, 고향행이 도피일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내가 스스로 친 생각의 덫에 갇힌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 년 내지는 일 년 반 정도 그런 시간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교환학생 기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설렘이 배가 되었다. 내가 가진 의무와 걱정들을 잔뜩 흡수하고 있는 학교 풍경, 지하철 6호선과 잠시 안녕할 수 있다니. 마음속의 짐들이 녹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토론토가 생활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점이다. 4개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 이곳도 생활이 된다. '몇 달 있다 떠날거니까' 하는 생각으로 제대로 꾸며놓지 않은 못난 내 방과 어지러진 책상, 하얀 벽을 보면 한숨이 나올 때도 있었다. 이곳에서 하게 된, 서울에서와는 다르지만 내 일상이 되어 버린, 새로운 고민들이 날 괴롭히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때 새로운 도피를 꿈꿨다는 것이다. health psychology 1차 시험을 제대로 말아먹고 페퍼톤스 노래를 들으며 부풀어 올랐던 마음을 떠올린다. 그날 나는 몬트리올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퀘벡주를 떠나 돌아와서 다시 이곳의 무기력함을 하루하루 견디게 해준 에너지원은 쿠바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뉴욕 여행을 앞두고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살지 걱정하느라 전전긍긍하던 나는 뉴욕에 가는 밤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우려가 씻은듯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어쨌든 토론토를 떠나는 탈것에 몸을 실었으니 느낀 해방감이었다. 하다못해 다운타운에 가는 ttc만 타도 기숙사 방을 벗어난 오늘은 특별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아 짜릿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교환학생으로서의 경험은 어쩌면 적당할 때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도망치는 것은 곧 다시금 무언가와 맞닥뜨려야 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도 같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모두 '방구석 여행자'이다. 우리는 여행 에세이나 여행 다큐멘터리 등을 보고 어떤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곳을 다녀온다. 그러나 일인칭으로 수행한 이 '진짜' 여행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바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방금 전에 '토론토가 생활이 되었다'고 권태가 잔뜩 담긴 어투로 말한 바 있는 나지만, 난 여전히 아쉽다. 서울도 다 알지 못하는 마당에 토론토는 오늘로부터 약 13일 정도만 있으면 나와 완벽한 단절을 이룬 공간이 될 것이다. 

  얼마 전 다른 대학에서 온 한국인 교환학생 친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친구는 동생이 토론토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덕에 동생도 토론토에 살고 있었는데, 둘은 서로 다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보니 주거도 따로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친구는 말했다. "동생은 아마 핀치에 한인타운이 있는 줄도 모를 거야. 걔는 업타운에 와 본 적이 없어." 둘은 같이 토론토에 살아도 완전히 다른 토론토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난 이런 지점에서 요크대학교를 교환교로 선택한 과거의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물론 토플 성적이 달려서 넣은 학교이기도 했고, 토론토대에 갔다면 어쩌면 훨씬 풍부한 학업 경험과 멋진 캠퍼스 생활을 누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교환학생으로서 요크대학교의 장점은 업타운에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거주는 업타운에 하면서 놀 때는 다운타운에 나가다 보니, 그게 불편하기도 하면서 좀 더 넓은 토론토를 보게 된 기분이 항상 들었다. 내가 만일 요크대에 오지 않았다면, 더군다나 Glendon Campus의 기숙사에서 살지 않았다면 이렇게 조용하고 예쁜 Lawrence역 근방을 잘 알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리 학교에서는 총 네 사람이 요크대학교로 파견을 왔고, 그 중 세 사람이 한 기숙사에 살았다. 이들과 대화하면서 항상 우리가 같은 학교에 와 있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비슷한 여행지(퀘벡주나 밴쿠버, 뉴욕)에 가도 그곳을 소화해 내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난 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지 않은 반면 어떤 친구는 buddy program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친구들을 사귀었다. 학업에 열중하는 친구도 있었고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 친구도 있다. 나의 경우 이 브런치를 운영했고 열심히 운동했으며 때로 혼자 외출했다. 비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지만 서로 토론토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조금씩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훗날 한국에서 만나 토론토 이야기를 나누면 토론토는 어떻게 그려지게 될까?


노바디의 여행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캐나다는 특히나 '노바디'가 되기 정말 좋은 공간이었다. 아시안의 비율이 높고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었다. 처음 토론토 다운타운을 혼자 걸어 에어비앤비로 돌아 왔을 때, 처음 등교해서 학교 안의 벤치에 앉아 팀홀튼 도넛을 먹을 때 난 알 수 없는 뿌듯함과 해방감을 느꼈는데, 이 챕터를 읽고 나서 깨달았다. 그것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노바디'를 추구하고 있던 결과물이었다. 작은 기숙사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 또한 '섬바디'가 되긴 했다. 아마 기숙사 사람들 사이에 나는 '아 그 한국(아시안) 여자애?' 정도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고 나서는 기숙사의 house meeting에 나가거나 화장실에 갈 때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리 살다가 떠난 여행지들도 토론토처럼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대도시인 경우가 많아서 다시금 '노바디'로서의 해방감을 느꼈다. 몬트리올 다운타운을 혼자 걸을 때나 센트럴파크에서 부부싸움 하는 커플을 딱딱한 베이글을 씹으며 구경했을 때, 그리고 추위를 피해 들어간 보스턴의 카페에서 샥슈카를 흡입하며 시간을 떼웠을 때가 그랬다. 

  그러나 어떤 '노바디'로서의 경험은 정체성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거나, 그래서 불쾌하기도 했다. 아바나에 갔을 때, 나와 내 친구들은 아시아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2분에 한 번 캣콜링을 당해야 했다. 친구들은 훗날 토론토에서 내가 사용한 '캣콜링 세례'라는 표현이 적합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그들이 한두 번 던진 말들이 쌓이자 여행지의 피로가 되었고, 나중에는 대꾸를 하지 않는 우리에게 욕설까지 퍼붓는 쿠바노들을 만나며 불쾌감은 극에 달했다. 김영하 작가가 여행지에서 자신이 '동양인 남성'이기에 위험하지 않은 인물로 판단당했다는 에피소드를 써 놓은 것을 보며 생각했다. 쿠바노들에게 우리는 길 가다 한두 마디 "추파"를 던져도 되는 '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인격체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우리는 결국 껍데기, 그리고 큰 단위의 정체성으로 판단당한다. 

  그리고 이런 점은 (동양인 여자인) 우리가 여행을 계획할 때 제약이 되기도 한다. 어딜 여행해도 '그곳이 안전할까'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남성들이라고 고민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범위가 남성에 비해서는 여성이 훨씬 넓으리라 본다.), 인종차별이 심한 곳은 가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상황, 하나같이 달갑지가 않다. 애매한 '노바디'가 되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은 이유다. 


여행으로 돌아가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은 요새는 한국에 가면 어떤 식으로 삶을 꾸릴지 행복하게 고민하고 있다. 1월엔 운전 면허를 따야지. 2월엔 알바를 해야지. 방학 인턴에 지원해 볼까? 학기 중에는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싶다. 나 교환 간다며 밥 사준 언니들한테 나도 밥을 사야지. 친구들과 술을 진탕 먹고 데이트도 많이 해야지. 책도 많이 읽고. 비건식당들도 많이 다녀야겠다. 지금이야 이렇게 기대감이 잔뜩 묻은 고민들이지만, 막상 서울에 돌아가면 또 다시 피곤해질게 분명하다. 가만 보면 대부분 의무에 대한 것, 혹은 한국에 있을 때 내 고민거리이던 것들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난 기대를 해 본다. 내게는 토론토, 그리고 북미 대륙에서 누렸던 반짝거리는 4달 동안의 경험이 있다. 비록 이곳에서 생활하는 와중에는 힘들고 지칠 때도 있었지만, 다시 여기서 생활할 수 없게 되고 의무로 복귀한 서울에서의 일상에 교환학생 경험은 큰 힘이 되어 주지 않을까? 난 캐나다에서의 네 달(앞의 여행까지 합치면 네 달 반, 달수로는 5개월!)의 시간 동안 앞으로 건강하게 의무들과 맞닥뜨릴 에너지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트리비아


- 그나저나 김영하 작가는 정말 유식한 사람인 것 같다. 저 짧은 에세이집 안에 다양한 레퍼런스가 적절하게 녹아 있다. 물론 본인이 노력한 결과겠지만, 나도 똑똑해질 테다. (과연)

 - 마치 토론토 생활 중 쓰는 브런치의 마지막 글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는데 그렇게는 안 되게 잘 살아 봐야겠다. 마지막 아이템을 빼앗긴 것 같긴 한데...그래도 할 말이 하나 정도는 더 있지 않을까?

- 그나저나 토론토생활기가 끝나면 이 브런치의 다음 주제는 뭘로 하면 좋을까

- 별 거 안 해도 하루가 참 잘 간다. 벌써 일곱시라니. 이제 저녁 먹고 영화를 볼 거다. 낮에는 낮잠도 자고 운동도 했다. 

- 내일은 토론토대 다니는 친구가 욕대 구경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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