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시절과 교환학생 시절, 난 어떤 책을 어떻게 책을 읽었을까
삶의 한가운데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점으로부터 약 세 시간 전, 나는 약 두 달에 걸쳐 책과 싸우듯이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완독했다. <삶의 한가운데>는 대학로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매했다. 처음 읽기를 시도했을 때는 왠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아 읽기를 포기했으나 아쉬워서 토론토로 가지고 왔다. 보통 3차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던 대부분의 시험들이 끝나고 나서인 10월 중순 무렵 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이제야 끝을 냈다. 소설은 그 자체로 불덩어리 같아서 막상 읽기 시작하면 빠져서 읽었지만 덮고 나면 펼쳐 볼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다 읽고 난 지금은 마음이 허하다. 책을 덮고 뭐라도 기록하려고 노트북을 켰다가 괜히 스펙업을 뒤지고 심지어 대외활동을 하나 지원했다. 니나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책 읽어봐야 별 수 없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은 나는 니나가 아니니까, 하는 생각도 조금 고개를 들긴 하지만.
토론토에서 독서하기-크레마 사운드 업
시험도 없고 <삶의 한가운데>에 무척이나 감동 받은 나는 다시 '독서열'에 불타오르고 있다. ('독서열'은 '학구열'이랑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나도 참 갈대 같은 게 <여행의 이유>를 다 읽고 나서는 여행에 관한 책을 또 읽고 싶어서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의 e북을 구매했다. 그것도 다 안 읽은 상태에서 이번엔 고전이 읽고 싶어서 뭘 살지 고민 중이라니. 대책 없다.
이제 와서라도 e북을 읽고자 하는 열정에 불타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토론토에 오기 전, 분명히 한국책을 구하기 힘든 토론토에서 e북이라도 있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며 e북 리더기인 크레마 사운드 업을 구매했다. e북을 구매한 기념으로 <거미여인의 키스>의 e북 파일을 구매했다. 나의 토론토 생활을 응원도 할겸 생일 선물도 할 겸 언니가 내게 무려 네 권의 e북을 선물했다. 의욕이 샘솟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크레마 사운드 업에 대한 내 만족도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무게와 부피를 차지하는 종이책을 휴대하기 부담스러운 사람, 나처럼 한국 책을 구하기 힘든 사람에게 추천 하긴 한다. 무게는 정말 가벼워서 휴대폰보다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에 짐을 꾸릴 때 하나 추가된다고 해서 부담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확실히 읽히기 위해 출시된 제품이니만큼 화면도 휴대폰보다 부드럽고 어둡게 해놓고 봐도 눈이 별로 아프지 않다. 생각보다 많은 책들이 e북 버전을 출시하고 있다.
그러나 크레마 사운드 업을 강력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페이지가 넘어갈 때 잔상이 너무 심하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몇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번 화면이 심하게 깜빡거릴 때가 있고, 크레마 측에서는 그건 딱히 고장난 건 아니니 그냥 쓰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 읽다보니 적응한 문제이긴 하지만 좀 그랬다. 두 번째는 내가 딱히 잠금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화면이 자기 마음대로 켜질 때가 간혹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방에 넣어 놓고 다닐 때 그 안에서 혼자 화면이 켜진 채 배터리가 방전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나름 '밀레니얼' 세대로 불리고 있는 나일지라도 옛날 사람이긴 한가보다. e북으로 가지고 있던 다섯 권의 책들 중 마지막 책을 읽을 때 진도가 도무지 나가지 않았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로, 내용이 나랑 안 맞았거나 그럴 수도 있지만...과연 그것뿐일까) 화면을 보고 있으면 답답하기도 헀고 책을 읽는 느낌이 잘 나지 않았다. 정말 내용 탓인가 싶어서 다른 책을 사 봤지만 매한가지였다. (혹시 다른 책이 시집이었던 탓일지도..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e북에 대한 애정이 미약하게나마 생겨서 내 크레마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토론토에서 독서하기 - 종이책
이러한 사태를 아예 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토론토에 보낼 짐 상자 안에 책을 약 10권 정도 넣었다. 그 중에는 내가 일본어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넣은 일본어 책도 있고 (딱 한 권만 펼쳐 봤다), 시집도 있고 소설도 있었다. 엄마는 밴쿠버 여행을 하면서 읽을 책과 포틀랜드 여행에 관한 정보북을 내게 던져 두고 귀국했고, 그 책들까지 합하니 내게 13권의 책이 있었던 셈이었다. 그 중 여행책과 일어책 한 권(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坊っちゃん)'이다..왜 가지고 왔지 한국어로 읽어도 별로였던 그 책을..) 빼고 다른 책들은 그래도 가지고 와서 한 번씩 들춰는 봤던 것 같다. e북을 보다 보니 종이책이 그립기도 했고, 한국어의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여기 있으면 이것저것 해도 시간이 안 갈 때가 많기 때문에 잘 펼쳐 봤다. 하지만 그 중에 완독한 책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듯하다. 그 원인은 다양할 텐데 먼저 가지고 온 책 중 시집이 많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다. 지난 학기 시 합평회를 할 때는 2주에 한 번 과제로 시집을 읽었어야 했는데 그것마저 꾸역꾸역 해내던 내가 어떻게 내 자발적 의지로 n권의 시집을 완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는, 이 문장을 쓰려고 보니까 내가 '종이책의 물성' 운운했던 게 다 핑계 같이 느껴지지만, 나는 확실히 구매한 책을 바로바로 읽는 걸 좋아하나 보다. 내가 생활비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책값에 썼던 건 읽지도 않을 책을 사들이는 데 맛이 들려있었기 때문인데, 그게 불가능하니까 독서에 대한 재미도 좀 떨어지고 가지고 있는 책들이 따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e북을 읽는 건 고역이었으므로, 결국 종이책으로 돌아가긴 했다. 끝으로 생각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피로했음을 들 수 있다. 나름대로 빈 시간들을 무언가 하면서 채워 보려 애를 썼지만, 대책없이 주어진 시간들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면 책이고 나발이고 눈이나 붙이고 싶을 때도 많았던 듯하다.
그렇긴 해도 시간이 넘쳐났던 탓에, 그리고 한국에서의 취미 생활과 생활 패턴을 조금이라도 덜 잃고 싶었기 때문에 독서를 아예 안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토론토에 지고 온(내가 지고 온 거 아니고 비행기가 지고 기사님이 날라주셨지만) 내 책들과 여행지를 따라 다녔던 크레마 덕에 그래도 풍족한 교환 생활을 했다.
올해의 책 어워드
토론토에 관한 이 브런치에서 '올해의 책'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는 건 올 상반기 내가 꽤 많은 책들을 읽을 여력이 됐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었고 휴학생이었다 보니 책을 접하고 읽기 정말 좋은 환경에 있었다. 오전 근무와 오후 근무로 시간이 나뉜다면 오전 시간엔 보통 할일을 하고 오후 시간에 책을 읽었다. 많이 빌리기도 했고, 그때는 월급이 꽤 많이 나왔으니 사기도 많이 샀다. 읽고 시간 버렸다 생각한 책도 있었지만 대부분 좋은 책들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언급하는 책들은 '제일' 좋았다기보다 그냥 인상깊었던 책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1. 소설보다-2018 가을(박상영, 정영수, 최은영)
작년 가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올해 봄에 읽었다. 교지 친구가 특히 '재희'와 '몫'을 언급해 줬는데, 박상영 작가와 최은영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더 기대가 됐던 기억이 난다. '재희'는 박상영 특유의 온도차(재기발랄했다가 사람 먹먹하게 하는)가 매력적인 소설이었는데 이 얇은 작품집에서 날 좀 더 건드렸던 소설은 '몫'이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교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4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어서 그런 듯했다. 나도 2017년 여름부터 출국하기 직전까지, 2년동안 교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마침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내 교지 활동에서 최대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때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여러 감각들- 예컨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의 감각이라든가 편집위원 사이에 일어나는 치열한 고민들,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이 내게 인상깊은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2. 친애하고, 친애하는 (백수린)
백수린 작가를 워낙 좋아해서(이번에 나온 엽편집도 빨리 읽어보고 싶다) 이 소설도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를 뛰어 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할머니-엄마-딸로 이루어진 세 모녀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서로가 상처와 사랑을 주고받은 과정을 기록한다.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볼 때 나는 나와 엄마는 끈끈한 관계고 영화에 나오는 모녀처럼 서로를 할퀴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에 제대로 몰입하지도 못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엄마에게 내가 줬던 상처들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엄마가 되어 보지는 못했지만 딸이라면 공감할만한 엄마를 향한 감정들이 섬세하게 그려진 소설이다.
그나저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 책을 떠올렸을 때 내용이 그렇게 잘 생각은 안 난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다.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디 있는지 잊을 정도로 몰입했던 게 눈에 선한데. 기억이 잘 안 나서 이 소설의 매력을 잘 소개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대신 작가의 말 중 인상 깊었던 한 구절을 옮긴다. (일기에 기록해 둔 덕에 그나마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내 소설을 읽어준 당신에게도. 당신들이 있어서 두려운 밤들을 몇 번이나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다. 익숙했던 풍경이 갑자기 저만치 물러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당신의 마음에 하루 종일 바람이 불어 뿌리 깊은 나무마저 휘청일 때, 오로지 각자만이 아는 슬픔과 불안이 석류알처럼 영글다가 터져 산산이 흩어지거나 당신이 땅거미 진 들판 위에 방향 잃은 여린 짐승처럼 홀로 서 있을 때, 당신의 존재가 나에게 그렇듯 나의 소설이 잠시라도 당신에게 희미한 온기와 불빛이 되어준다면 무엇보다 기쁠 것이다.
이 구절이 좋았던 이유는 이 소설이 여성으로서의 슬픔, 아픔 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설을 통해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게 도리어 작가님이 나아갈 용기가 되어 준다니, 소설이라는 매체가 선사한 아름다운 연대가 아닐 수 없다.
3.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 손미
마지막 책은 토론토에서 읽은 책이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몇 안 되는, 전공과제나 합평회과제가 아닌 내 자율적 의지로 완독한 시집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시 합평회를 하던 당시 합평회원들 및 교수님과 혜화에 위치한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방문했을 때 교수님께 선물 받은, 추억이 잔뜩 묻은 시집이다. (합평회원들이 한 권씩 선물을 받았고, 그날 우리는 칼국수도 먹고 카페에서 합평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다 읽으려고 한 것도 있지만, 시집 자체가 좋기도 했다.
이 시집 역시 읽은지 세 달이 넘었기 때문에 그때 받은 정확한 인상은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아픔과 충격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시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었다. 시를 읽는 내내 내 안에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 내 안의 금 가 있는 어떤 부분들이 더 약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보여서 아픈 사람들끼리 손을 잡는 게 또 다시 사람들이 강해지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시집이었다.
대부분 뒤로 갈수록 좋은 시가 많았던 기억이 있는데 가장 좋았던 시는 표제작이다. 이 시집을 사게 된 계기마저도 표제작을 활용한 출판사의 프로모션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내 인생의 시라고 해도 무방할 글이다.
이 글은 Lawrence 역과 York Mills역 사이의 스타벅스에 앉아있던 오후 3시경부터 약 7시간동안 쓰였다. 물론 7시간동안 글만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니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딴짓도 하고 걷기도 했지만. 이 시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사이에 결국 내가 톨스토이의 <부활> 1권을 구입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정규학생 자격으로 유학하고 있는 언니가 자신이 e북에 적응했음을 이야기해 주면서 오히려 두꺼운 책을 읽을 때는 정말 좋다는 꿀팁을 알려줬는데, 그래서 분권이 되어 있는 책을 골라 봤다. (처음에는 천일야화 생각했다가 그건 다 읽으면 6권이길래 포기했다. 종이책으로 도전해야지.) 사실 지금 시집도 한 권 읽고 있는데 (송승언 시인의 <철과 오크>.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백팩 앞주머니에 있었고 사실 난해하고 어렵지만 가끔씩 마음을 후려치는 구절들이 있다.) 내가 <부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귀국도 하고 방학도 다가오고 장거리 비행도 하니까 나 자신을 믿어 본다.
오늘의 트리비아
- 처음 걸어보는 길을 걸었다.
- 룸메이트가 방을 뺐다.
- 사과주스를 마셨다.
- 런던포그를 코코넛밀크로 만들어 마시면 첫 입만 맛있다.
- 토론토를 떠나기 귀찮다. 방 정리하기 귀찮고 토론토에도 있고 싶고 서울에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