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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Mar 11. 2020

몇 가지 이야기를

퀼트 같은 글 - 준 일기

이 글의 정체성과 딱 어울리는 사진이 내 갤러리에 있었다니. 믿기지 않겠지만 청계천이다.


  일기를 쓰지 않은지 오래됐다. 일기는 원래 종이로 된 일기장에 펜으로 쓰고 있었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조급함을 느끼는 편이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게 아닐까, 일기를 쓰지도 못할 만큼 힘든 게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다. 애인이랑 청계천 산책을 하다가 무작정 카레를 먹으러 가고, 집 근처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언니의 세상살이를 듣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랑 부어라 마시는 게 꽤 행복했는데. 그런 일상을 보낸 내가 일기 안 쓴 것 때문에 자책하는 상황은 만들어 주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과거의 내 족적으로부터 위로를 많이 받는 사람이다. 우울과 힘듦에 극적으로 젖어 들어 온 세상의 절망은 내가 다 끼얹은 것 같은 때 과거의 일기를 읽으면 삶을 향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받는 느낌이다. 내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산 적이 있었지, 이렇게 좋은 순간이 있었지, 그래 나도 이런 사람이었는데. 등등. 요 며칠이 게으른 나 때문에 미래의 나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없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요 며칠에 대한 조각보 같은 일기를 써 본다. 


#1


  언니와 대화를 할 때면 느끼는 건데 요사이 나는 할 말이 없다. 내가 할 말이 없는 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어딘가 삶이 다시 무료해졌음을 증명하기도 하면서 별 탈 없이 잘 먹고 지냄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면 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대체로 그들은 크게 두 개의 굵은 주제로 나뉜다. 나는 말이 안 그래도 많은 사람이라 들어주는 사람이 된 것 같은(정작 언니는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다) 요새가 좋다. 

  슈퍼문이 떴다. 검은 천 위에 난 작은 구멍으로 매우 강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언니가 굵은 주제에 해당하는 소원을 빌었다. 나는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바라는 게 없나 보다 싶었다. 결국 근본적인 소원을 빌었다. 좋은 데 빨리 취직하게 해 주세요. 언니가 그 위에 얹었다. 제발.

  출근을 해야 하는 언니는 먼저 잠을 자고 있다. 복층 원룸으로 이사 온 지 두 달째. 일반적인 원룸이었던 지난 집과는 달리 위아래로라도 공간 분리가 되어 있어 그나마 동거인의 눈치를 덜 보고 내 할 일을 할 수 있어 좋다. 밤 산책을 나서서인지 슈퍼문을 향해 비나 마나 한 소원을 빌어서인지 자기 싫어져서 워드 창을 열었다. 오랜만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나는 내가 쓴 시 다 마음에 안 드는데 가끔 그나마 마음에 드는 시들이 있잖아) 시도 썼다. 정말 자야 했는데 정각을 사랑하는 나는 시를 쓰다 정각을 넘겨버려 여기에 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2


  애인을 효과적으로 놀리려면 애인이 보는 앞에서 곰신카페에 들어가면 된다. 괴로워하는데 미안하지만 은근히 재미있다. 애인의 입대는 얼마 안 남았다. 

  시간과 생각할 여력이 넘치던 토론토에서 처음 '곰신카페'라는 존재를 발견했을 때 그 기형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진지하게 곰신 문화에 대한 글을 써볼까 고민했었다. 교지 시절엔 마감이라도 있었지 마감도 없는데 왜 그런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세웠을까. 당연히 글은 안 썼고 곰신 문화에 대한 거대하고 복잡한 의문만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생각해 보니 도서관에서 일하던 6월경에는 "김치녀"에 대한 글을 써 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김치녀"라는 키워드가 가진 역사를 공부해 보자는 취지였다. 교지 활동이 끝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교지를 떠나고 나서 생각이 둔해지는 내가 나도 무섭나 보다. 사실 교지에 있던 시절의 내가 그렇게 날카로웠는지 잘 모르겠고 아니라고 생각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교지 하던 시절에는 내 주변에 자극이 잔뜩 있었는데 교지를 나가고 토론토 땅에 떨어진 순간 날 자극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사라졌다는 점 정도?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교지를 할 때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내가 얼마나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여하튼 생각 없는 나에 대한 강박이 심하다.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는 순간들도 세상에 지고 있는 것 같다는 방향으로 기억하게 될 때가 많다. 백수린의 소설에서 화자가 자신의 인생이 '거대한 체념'과 같았다고 말하는 문장을 읽었다. 주변에서 부추겨 주지 않으니 요새 나는 내가 '거대한 체념'의 입구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같은 백수린의 소설에서 그렇게 말했듯, 삶의 작은 어긋남(정확한 표현은 아니다)을 알아버린 이상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인생에서 생각 제일 많이 해야 했던 교지 시절이 내 삶의 미세한 어긋남을 가져다주었다고 여기기로 한다. 무뎌지는 내가 미미하게나마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건 그 미세한 어긋남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라고도 생각하기로 한다. 

  애인을 놀리는 효과적인 방법에서 여기까지 왔다. 산으로 간 이야기 같지만 아니기도 하다.


#3


  4개월 간의 교환학생 생활은 곧 유급노동과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했는데, 이는 곧 돌아오면 다시 구직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2월 한 달 동안 부당해고도 당해 가며 열심히 구직한 결과, 요즘 열심히 유급 노동을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학원 튜터 아르바이트인데, 통근 길이 길어서 특별하게 느껴진다. 

  지하철만 20분을 넘게 타고 낯선 동네로 들어가는 기분은 기묘하다. 가는 길에 창밖으로 난데없는 플랫폼 창동이 보인다. 학원 근처에는 분식점이 많다. 아이들이 분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거겠거니 생각한다. 가끔 학원 엘리베이터가 이러다 멈출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학원은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휴업하지 않는다. 학원이 사업장이기 때문도 있겠지만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이 휴업을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학원의 아이들은 꽤나 타이트한 관리를 받는다. 나는 아이들이 받는 케어에 일조하는 역할이다. 졸면 깨우고 늦으면 잡아 오고 쉬는 시간엔 교실에 소독제를 뿌리고 애들이 어떤 공부를 덜했는지 확인한다. 아이들이 푸는 문제집이나 (어느 날 무료했던 나는 펼쳐져 있는 수학 문제를 머릿속으로 풀다가 내가 얼마나 수학 머리가 없는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고) 피로에 절은 표정이나 강의 소리를 들으면 내 10대 시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뭐가 재미없게 만드는 건지, 학교 교육은 참 재미가 없다. 아이들의 피로에 기생해서 돈을 버는 주제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아르바이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퇴근이다. 이렇게 말하면 퇴근은 다 좋은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학원 앞에 정말 맛있는 꽈배기 집이 있어서 좋다. 지하철역이 노선의 워낙 끝자락이라 지친 몸을 어디든지 앉힐 수 있어 좋다. 가는 길에 애인 집에 가는 환승역이 있어서 돌발적으로 내릴 수 있어서 좋다. (한 번밖에 안 내려 봤고 그것도 이미 약속된 하차였다.) 지상철이 이어지다가 지하철이 되는 부분도 좋다. 퇴근을 위해 출근해야지.


등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허전한 3월. 힘을 내서 보내야지.



글에 대한 첨언 


  묘하게 글이 3번으로 갈수록 길어진다. 1번은 오늘 있었던 일, 2번은 요사이의 고민, 3번은 둘을 합친 거라 그런가.

  퀼트 같은 글을 쓰는 데 성공했는지, 이 글을 읽고 미래의 내가 힘이나 깨달음을 얻을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자기 싫었던 내가 좋은 핑계를 찾았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일요일에 있었던 즐거운 한바탕 술파티 이야기도 쓰고 싶었는데 지난 글과 느낌이 겹치는 것도 같아서 생략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2번 글이 추상적인 것 같아 수정했고, 발행 키워드도 이상해서 수정하기로 한다. 새벽에 이런 글 안 써야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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