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했는데 일 바로 시작하기 싫어서 쓰는 글. 내가 좋아하는 회사 창밖의, 향수를 자극하는 풍경.
요새 사람들과 대화할 때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상하게 지난 학기는 기억이 잘 안 나요."가 그것이다. 지난 학기는 여느 식상한 표현처럼 '눈 코 뜰 새 없이' 지나가 버렸다. 그나마 인상 깊은 지난 학기의 조각은 학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일어난 집안 문제와 코로나 사태 발발로 변화하던 시스템 속에서 정신없어하던 내 모습뿐. 게다가 직전에 교환학생이라는, 인생에서 꽤 큰 편에 속하는 사건도 지나 온 이후였기 때문에 지난 학기가 더욱 하잘것없으면서도 애잔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느끼기에 지난 학기의 나는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너덜너덜 문드러진 모습으로 압축되어 떠오르는 듯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는 보통 책을 읽는데, 2호선의 충정로역과 아현역 사이쯤에서 한계를 느끼는 편이다. 보통은 아현역에서부터 환승역까지 잠을 자는 편이지만, 오늘은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과거의 내가 올린 스토리들을 쭉 봤다. 평소 잊고 살았던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람을 만나는 대신 인스타그램으로 사람들이 만든 빙고 게임을 서로 공유하던 것. 시험을 치기 싫어 툴툴대면서도 심리학 수업시간에 마주하는 교수님들의 통찰에 놀라 함께 수업을 듣던 친구들에게 연락하던 기억.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합평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시를 내던 기억. 손님이 안 오는 이디야에서 나누던 잡담. 생각보다 착하던 학원 아이들 등.
지난 학기 내 또 다른 자아(.. 부캐?)는 서어서문학과 부전공생이었다. 중남미 문학 교양과 스페인어 초급 교양을 들었다. 스페인어는 비록 여느 유럽어답게 여성어 남성어가 나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영어와 비슷한 데다가 내가 전부터 공부하던 일본어처럼 억양이 강해서 배우는 재미가 있고 마음에 들었다. (아직 중급을 안 해서 이따위 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다.) 중남미 문학 수업을 들으면서는 코로나와 금전적 문제 때문에 한동안은 절대 닿지 못할 지구 반대편을 꾸준히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것을 느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고, 그것을 포착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첫 휴학을 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책도 생각보다 읽었다. 보관된 인스타 스토리를 보면서 내가 읽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음을 느꼈다. 글귀와 함께 올려놓은 사진을 보고서야 그때 책을 읽고 느낀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글이 쓰고 싶어졌(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열심히 올렸)고, <인생의 베일>에 나오는 야비한 남성들의 치밀함을 접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심한 말들이 줄줄이 뿜어져 나왔다. 하다못해 합평에서 읽기로 한 시집을 읽는데 제목 말고는 형편없게 느껴져서 같이 합평하던 언니에게 불평하던 내 모습까지도, 돌이켜 보면 다 재미있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즐겁게 지나간 스토리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지하철역을 나오고 있었다. 역에서 회사까지 휑한 길을 걸으면서 다짐했다. 때때로는 개같을지라도, 칭찬받으면 좋아하고 지적받으면 풀 죽으며 동료들과의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퇴근하면 여자친구 무대영상을 돌려보는 이 시기를 즐기자고. 그리고 훗날 구경하면서 맞아, 이때는 이런 즐거움이 있었지, 하고 새삼 깨달을 수 있는 흔적을 많이 남기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