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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Dec 15. 2020

하루의 중턱에서 외치는 주문

일본 드라마 여주인공 여러분 감사합니다

<교열걸>에 나온 이시하라 사토미. 드라마는 끝까지 못 봤지만 이 캐릭터가 정말 좋았다. 캐릭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은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의 동기가 아니라 바깥의 요인들 때문에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시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그 점을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어떤 행동을 하면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 때는 싫어서 소름이 끼친다. 그나마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행동할 때는 다행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행동을 하게 될 때, 그렇게 내가 의도하거나 바라지 않았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는 진심으로 내가 싫어진다.

내가 급격히 미워지는 어떤 때는 내 삶이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생각을 한다. 스팸 메시지가 온다거나, 여러 사람들 중 내 이름만 불리지 않았을 때 같이 사소한 순간에도 잔잔하게 흐르던 마음이 쿠궁하고 떨어지는 것 같다. 내가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고 실은 나를 해치는 큰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음을 나 자신에게 주입하는 것은 그런 상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예민해져 있는 스스로가 매우 한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마법처럼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일본 오피스 드라마 여자 주인공에게 빙의하는 것이다. 잘 떠오르는 방법은 아니지만 되도록 그러려고 한다. 일본 오피스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들은 (드라마적으로 잘 설계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지만) 꽤나 단순하다. 정의감이 넘치고 일을 사랑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눈 앞에 주어진 일을 '요시(よし, 한국어로 좋아! 으쌰! 같은 느낌.)!' 한 마디로 이겨낸다. 누군가와 빚어낸 갈등에는 특유의 떨리고 정의로운 목소리로 맞선다. 날카롭고 별난 동료도 그들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팀에 어우러질 수 있게 된다. 아무리 피곤해도 퇴근길 이자카야에서 맥주나 하이볼 한 잔이면 다음날을 시작할 수 있다.

    사실 실제로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머릿속에서 내가 만들어냈을 뿐이다.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얼굴은 아다치 리카(요)인데, <아네고> 때문에 그가 걷고 맥주를 마시는 폼은 시노하라 료코다. '요시!'는 <교열걸>이나 <리치맨 푸어우먼>의 이시하라 사토미의 것인 듯한데, 정작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리갈하이>의 아라가키 유이. 일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요)를 제외하고 내가 열거한 이름들은 배역이 아닌 배역을 연기한 배우들의 이름이다.

역할의 이름도 제대로 생각 안 날 정도로 일드를 제대로 본 적은 오래됐고, 내가 상상해낸 캐릭터는 실존보다 허구에 가깝지만, 어찌 됐거나 난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미련하리만큼 강한 열정과 선한 기운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의 조합은 내가 누구도 구해줄 수 없는 감정의 수렁텅이에 빠졌을 때 속으로 '요시!'를 외치고 스스로, 혹은 죄 없는 타인에 대한 증오를 잠시나마 극복할 수 있게 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남은 하루도 열심히 살아보기 위해 장황하게 외쳐 보는 '요시!' 다.


번외. '요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드가 뜸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자라면서 나의 내면은 점점 복잡해지는 데 비해 일본 드라마는 너무 단조롭다.

- 드라마의 세련된 정도가 내가 한창 일드를 보던 200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에 멈춰 있는 것 같은(기분이 든다.)

- 일본 드라마에는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도 너무 없다! (언내츄럴 제외,,라기에는 그 작품에 나오는 현실이 너무 일본의 현실처럼 느껴져서 힘들다.)

- 볼 게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후반~2020년 작품이 언급되는 이유

- 일본어 공부를 하려고 좀 봤다. 공부에 큰 도움은 안 됨. 최근에 <나기의 휴식>을 보기 시작.

- <도망치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시하라 사토미가 나온 드라마들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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