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에 본 드라마: <짐승이 될 수 없는 우리>
스포일러 있음.
아라가키 유이와 마츠다 류헤이 주연의 <짐승이 될 수 없는 우리>(이하 <짐승>). 이 드라마, 뻔하지만 특이하다. 십 년이 넘도록 유구하게 반복되는 일드 클리셰(예컨대 갑작스럽게 교훈스러운 말 늘어놓기)가 등장하면서도 기존의 일본 드라마 공식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짐승>의 인물들은 힘이 빠져있거나, 아프거나, 삐딱하다. 이들의 의사소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멋이 없다. 회사의 만능열쇠 같은 직원 아키라(아라가키 유이)는 거절해야 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억지로 웃는 사람이다. 그가 소심하게 자기 할 말을 다하는 장면은 구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키라가 '기분이 나쁘다'라고 표현하는 코우세이(마츠다 류헤이)는, 혼자 염세적이고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제삼자 입장에선 참 재수 없는 캐릭터다. 아키라의 오랜 애인인 쿄야(다나카 케이)는 겉으로 완벽해 보이지만,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끝끝내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우유부단한 쿄야가 내치지 못하는 그의 전 애인 슈리(쿠로키 하루)는 사람의 상처에 데어 몇 년 동안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버티는 (나와 가장 다른 캐릭터임에도 비슷하게 느껴진, 그래서 가장 이입하게 되던) 캐릭터다. 여기에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척하지만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선을 넘기도 하는 쿠레하(키쿠치 린코)까지. 매일 밤 새로운 맥주를 제공하는 펍 '5tap'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멋이 없으면서도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기 때문에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힘 빠지고 나약한 인물들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나타내는 효과는 간단하다. 어쩌면 '요시!'로 퉁쳐 버릴 수 있는 삶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 그리고 '요시!'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일들의 그림자를 살피는 것이다. 다른 일본 드라마들처럼 적당히 따뜻하고 힘차며 오버스럽게 미화될 수 있었던 장면들을 투명하게 보여주면서, <짐승>은 '짐승이 될 수 없'어서 괴로운 우리가 결코 이 세상에 혼자 남은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여러 사람의 역동으로 구성되는 이 세계가 마냥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임을,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은 말 그대로 짐승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통념과 규칙을 깨기도 한다. 그러나 드라마 바깥의 세상이 보통 그러하듯, 통념과 규칙을 부수고 나선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차가운 현실이다. 회사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아키라를 보고도 그의 폭력적인 상사는 자신의 과오를 그다지 뉘우치지 않는다. 오히려 가스라이팅을 시전할 뿐이다.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그간 저질렀던 부정을 고발하는 코우세이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서사는 드라마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에 쿄야, 슈리, 쿠레하는 모두 사실상 도망치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망치기에, 그리고 이들 앞에 놓인 여정이 냉정하기에 앞서 말한 혼자 있지 않은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말인데, 이 드라마는 관계에 관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아키라가 현(곧 '전' 애인이 되는) 애인의 전 애인인 슈리, 그리고 (전) 애인의 모친인 치하루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것이 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일종의 지향점이다. 아키라는 원래 자신의 애인인 쿄야를 신경 쓰고,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만난 여러 사람들과, 오히려 그를 배제하고도 맺을 수 있는 연대를 형성한다. <짐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통념을 깨고서 여러 관계를 형성하는데, 여기에서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반드시 같은 집에 살부딪히며 살지 않아도 퇴근길 맥주 한 잔에 이야기를 털어 놓을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우리는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
<짐승>은 조용한 응원이다. 보고 있는 게 맥빠지고 고역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손에 땀을 쥐게하거나 마음 설레게 하지 않기 때문에 어딘가 밍밍한 이 드라마는 완벽한 드라마의 반열에 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이 드라마를 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난 우리의 인생이 대부분 완벽한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신 운명적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종소리를 들으러 찾아간 아키라와 코우세이처럼, 드라마가 됐든 인생이 됐든 좋은 의미부여만 해 줄 수 있으면 그만이다. 이 드라마가 어쩌면 드라마 바깥에 사는 우리의 의미부여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담
- 본격 맥주 마시고 싶은 드라마. 이 드라마 볼 때 시험기간이었는데 시험 다 끝나자마자 맥주 네 캔 샀다.
- 쿠로키 하루... 마스크만 봐도 좋은 배우라고 생각은 했으나 <짐승>에서 포텐이 제대로 터져버린 듯하다. 자칫 미워 보일 수 있는 역할에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건 슈리 역을 맡은 사람이 쿠로키이기 때문.
- 계속해서 슈리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캐릭터 자체가 일본 드라마에서 그간 볼 수 없었던 입체성을 지닌 캐릭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런 면에서 각본가 노기 아키코는 일본 드라마계에서 나오기 힘든 인물일지도. 이 사람이 쓴 드라마가 <언내츄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교열 걸>이니... 말 다했고
- 아라가키 유이는 드라마 보는 눈이 참 탁월한 듯하다. 그가 선택한 작품이 실패하는 걸 보지 못했다. <짐승>은 각키가 출연한 작품 중에 시청률이 가장 낮은 편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쨌거나 난 오히려 슈퍼스타 이미지이던 각키의 연기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 마츠다 류헤이는 왜 이렇게 잘 나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주얼도 연기도 별론데...(물론 띠꺼운 연기는 잘하더라만 9화에서 우는 연기 보고 당황 그 자체였다.)
- 러브라인에 대해서도 할 말 많다. 꼭 아키라와 코우세이가 엮여야 했나 머 이런 반응도 많긴 하던데, 개인적으로는 마지막화 마지막 장면이 참 마음에 들었던지라. 누군가가 구제해 주는 운명을 기다리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개척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이라 좋았고 드라마 본 사람이면 알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