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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 May 29. 2021

오엠지 글이 안 써져

나의 고질적 증상 뇌변비.

  전공 및 진로 특성상 억지로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많다. 이 문장으로 글을 여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글은 부자유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쓰이는 중이라는 점. 둘째, 난 지금도 강제된 글쓰기를 위해 내 몸을 열람실에 가두고 있다는 점이다.


1. 2018년 그날, 나는 왜 약수역에 갔나?


  교지 활동을 할 때다. 1년 동안 네 권의 책에 각각 1~3편의 글을 싣던 나에게 마감에 쫓기는 상황은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그때마다 낯설지도 않지만 익숙한 괴로움을 느끼곤 했다. 당시에는 신당역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살던 때는 센트라스 상가 1층에 24시간 영업하는 탐앤탐스가 생기기 전이었다. 동네에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24시 카페는 약수역에 있었다. 어떻게든 글을 완성하고 싶어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지하철을 타고 약수역으로 갔다. 실은 걸어도 되는 거리였는데 나 자신에게 돌아오지 말자는 다짐을 하기 위해 혼자서 벌인 상징적인 퍼포먼스였다. 음료수 한 잔을 시키고 워드 창을 열었다. 약수역 할리스 2층 공기는 탁했다. 공기가 탁하든 말든 눈치 없는 커서만 공허한 워드 창 한 구석에서 껌뻑거리고 있었다. 한 줄 쓰고 카톡창을 열고 한 줄 쓰고 페이스북 피드를 내리던 나는 급기야 소파에 누워서 천장 사진을 친구 C에게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저히 졸려서 안 되겠다 싶어 아래층에 내려가 음료를 한 잔 더 시켰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밤이니까 논 카페인 음료를 주문했는데, 두 번째에는 특단의 조치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보았다. 웬걸. 아무 효과 없었다. 의미 없는 문장을 타이핑하다가 졸고 깨어나서 지우고 다시 타이핑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새벽 두 시. 이대로는 작업에 진척이 없었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기로 결심했다. 새벽 두 시에 혼자 걸어가기에 약수역에서 우리 집은 썩 가깝지는 않았다. 택시를 탔다. 그러니까 지하철 운임+(할리스) 음료 두 잔+택시비의 지출을 하고 글은 거의 안 쓴 것이다. 돈벌이라고는 과외 하나만 하던 시절이다. 나는 왜 약수역에 갔을까.


2. 인스타의 신에게 빌어보았다.


  위에 서술한 사례와 같은 증상을 나는 혼자서 뇌변비라고 부르고는 한다. 글은 이성 및 감성의 작용, 그러니까 뇌 활동의 배설물 같은 건데 (왜냐면 내 손끝에서 탄생한 무엇이 됐든 썩 아름답진 않으니까) 그마저도 제대로 생산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뇌변비는 내 고질적 증상으로, 억지로 하는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2017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약 24시간 전에도 뇌변비는 진행 중이었다.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멜랑콜리 논의와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에 관한 교수님의 지리한 논문을 네 바닥으로 요약하고 허접하기 짝이 없는 내 생각을 한 바닥 쓰는 과제를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게 과제의 문제인 줄 알았다.

  얼마 전 방송국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랑 같이 기획취재물 공모전에 나가기로 했다. 기획을 시작할 때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답답한 로스쿨 준비에서 벗어날 틈도 생기고 간만에 좋은 쪽으로 머리도 쓰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그랬으나... 어느새 마감이 이틀 남았는데 난 왜 워드 창이 아닌 브런치 창을 보며 이런 뻘글이나 쓰고 있는 걸까? 아이템의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가지 않는 내 머리의 문제였다. 물론 기사 글은 내가 자주 써 보지 않던 포맷의 글이라는 핑계가 아예 안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충분히 나를 변호할 수 있는 핑계인지까지는 모르겠다. 한컴타자에 타자검정을 하면 타자수 700이라고 뜨던데, 그와 상관없이 한 시간에 700타 정도 타이핑한 것 같은 기분으로 카카오톡 창을 열고 열심히 답장했다. 왜 머리 싸매고 있지 않는 건데? 왜 열람실에 몸을 가두기까지 해놓고 브런치에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건데?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서 몸과 마음을 괴롭게 했지만 개의치 않으며.

  그러나 개의치 않기에 실패하고 답답한 마음에 인스타에 스토리를 올렸다. 사람들에게 응답을 받기로 했다.

 '뇌정지 안 오고 글 잘 쓰는 법 알려주세요'

  답변이 왔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자신에게도 알려달라는 사람이 세 명. 벤야민을 멀리해보라는 답(?)이 한 명이었다. 뇌변비는 인류 보편의 증상이라는 명쾌한 해답을 얻고 시간이 마저 흘러갔다.


3. 모니터만 보고 있으니까 더 답이 없는 것 같아서 정면을 보기로 했다. 대학 도서관 열람실. 다른 사람들은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 내가 선택한 길에 책임을 지자. 뇌변비는...어떻게든 이겨내 보는 걸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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