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한 장소: 다운타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워터프런트(항구), 스페이스 니들, 팝컬처 박물관, 캐피톨,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시애틀
엄마와 내 발 밑에 있는 시애틀(왠지 몰라도 이 도시에선 잘 찍은 사진이 많지 않다 ㅠ)
시간대별로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 참 좋았다 식의 서술을 지양하기로 해놓고 시애틀 여행기는 그냥 그렇게 한 번 써 보려고 한다.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었는데 마음에 안 든다.
요약: 난 시애틀이 좋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금도 좋아한다.
시애틀에 가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험난했다. 생리 둘째 날인가 셋째 날이었고, 예약한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내가 타 본 고속버스 중 최악의 시설을 자랑했다. 가죽이 다 까진 딱딱한 의자와 불쾌한 냄새, 성질 많이 내는 한국계 기사님. 더군다나 하필 내가 버스를 타기 전에 여자화장실이 고장 나서 남자화장실을 써야 했다. (음 그래 그런 경험을 언제 해보겠냐만은) 여느 북미의 교통수단-특히 육로-이 그러하듯 세 시간 반 걸린다는 여정은 그보다 더 걸리는 느낌이었다. 와중에 캐나다-미국 국경을 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보니 입국심사도 걱정이었다. 사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입국하는 입국검사는 정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처음이다 보니 괜히 긴장이 됐나 보다. 버스에 있던 일행 중 하나가 장난을 치다가 심사 줄을 이탈하는 바람에 출입국 관리원의 제재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내 일도 아닌데 괜히 내가 다 겁을 먹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내 눈앞에 시애틀은 말 그대로 펼쳐졌다. 터미널에서 시내에 나가기 위해 탄 모노레일에서 마주친 시민들의 시크한 복장(이들에 비하면 밴쿠버 사람들은... 좋은 말로 정감 있다)이나 알록달록한 도로가 날 맞이했다. 건물 외벽이 햇빛에 반짝였고, 다운타운은 활기가 넘쳤다. 피곤에 절은 나마저도 행복해지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는 듯했다. 숙소로 향하던 길에서 발견한 브런치 집에 들어가 피자로 저녁을 때우면서, 엄마와 함께 이곳이 참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 번 시애틀이 좋아지니까 계속 좋았다. 숙소에서 엄마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같이 보다가 졸았는데, 막상 영화에는 시애틀이 뉴욕보다 비중도 있게 나왔는데도 시애틀이 좋았다. 트렌치코트를 챙겨 오지 않는 바람에 '만추'의 탕웨이 코스프레에는 실패한 채, 생각보다 날씨가 추워서 아무 기념품샵-보라색이 테마인 보라 샵이었다-에 들어가서 산 보라색 맨투맨을 입고 돌아다녀도 행복했다. 사람이 많은 스타벅스 1호점은 밖에서 보기만 해도, 훈제연어를 넣어줄 줄 알았던 베이글 샌드위치에 통조림 같은 연어가 들어있어도 괜찮았다. 엄마와 나는 원한다면 바다에도 갔다가 빌딩 숲 한가운데를 걸을 수 있는 시애틀에 점점 더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떤 건물, 어떤 공간에 들어서도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해 행복했다.
돌이켜 보니 길고 잦았던 교환학생 시절의 여러 여행 중에 이렇게 무턱대고 좋아했던 공간은 없는 듯하다. 그때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도 엄마와 함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을 벗어나 항구를 걷던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다. 짧았지만 내내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을 준 시애틀아 참 고맙고 더 좋은 모습으로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
+ 한편 파이오니어 광장에 모여 있는 노숙자들을 보면서 이곳의 삶도 꽤나 팍팍하구나 생각했다. 미국은 미국이었던 것이다.
++ '만추'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나오는 시애틀은 우중충하고 비가 계속 오는 느낌인데 우린 여름에 가서 그런가 날도 참 좋았다. 하지만 우중충한 시애틀도 왠지 궁금.
+++ 팝송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팝컬처 박물관을 강추한다. 정말 관광지스러운 공간인데 재미있게 구경 잘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기획전으로 공포영화 전시도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음악 관련 전시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콘텐츠를 준비해 놓는 듯했다. 아주 재미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