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자원봉사 후 찾아간 호주의 병원
어제 일요일 저녁 먹기 전, 샤워를 하고 나온 제제가 유독 몸을 떨며 추워했다. 호주가 이제 슬슬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이다 보니 아침저녁으로는 무척 쌀쌀해진 공기 탓에 그러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얼른 물기를 말려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손과 발이 냉골처럼 차갑다. 이렇게 손발이 차가워질 때면 꼭 밤에 열이 오른 경우가 많았는데, 어째 기분이 싸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을 먹이고 재웠는데 재운 지 한두 시간쯤 지났을 때쯤 꿈틀거리며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가서 이마에 손을 짚어보니 뜨끈했다. 체온계로 재보니 온도는 38.9도, 상당한 고열이었다. 나는 우선 제제를 살짝 깨워 한국에서 챙겨 온 해열제를 먹이고 다시 재웠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일은 처음 가는 Excursion(우리의 소풍 같은 행사)이 있는 날이다. 거창한 소풍은 아니고, 주변 동네를 함께 돌아보는 일정인데 학부모들 중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에 자원하여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절대 해볼 수 없는 경험이기에 선생님께 내일 참여하겠다고 미리 말씀드려 놓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를 빠지기가 어려워 제발 아침까지 열이 내리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었다. 새벽에도 일어나서 한번 더 열을 체크하니 다시 열이 올라있었다. 해열제 복용 후 두 시간까지는 열이 잘 내리다가도 그 이상 지나가면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벽 2시쯤 한 번 더 해열제를 먹이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제의 상태를 확인해 보니 컨디션이 나쁘지 않고, 고열이었던 열도 조금은 내려 미열이 되어있었다. 등교를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서둘러 채비를 하고 학교로 출발했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아침공기가 무척 쌀쌀했다. 일요일에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던 것 같다. 단단히 챙겨 입고 나섰는데도 아침 바람이 무척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제제는 나와 함께 등교하고 내가 교실까지 올라가서 옆에 있으니 무척이나 좋아하는 눈치였다. 계속 내 손을 꼭 붙잡고 배시시 웃으며 엄마가 학교에 같이 와서 좋다며 연신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제제의 상태가 나빠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기며 제제와 교실로 함께 올라갔다.
9시 30분쯤 학교 운동장으로 2학년 친구들이 다 모인 후 담임 선생님의 지도 아래 2명씩 줄을 맞춰 서서 학교를 나섰다. 나와 같은 학부모 봉사자들은 중간중간에 서서 뒤쳐지는 학생들은 없는지, 줄을 잘 맞춰가는지 챙기며 아이들을 따라갔다. 2인 1조가 되어 동네 주변을 살피고 선생님이 미리 나눠놓은 카테고리에 동네 주변을 체크하는 활동을 하며 걸어가는 Community Walk Activity였다. 학교 주변을 크게 돌아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대략 30~40분 정도 소요된 것 같았다. 난 제제 옆에 붙어서 제제 반 친구들을 챙기며 함께 걸었다.
거의 학교로 도착할 때쯤 해열제 약발이 떨어졌는지, 제제가 다시 한기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컨디션도 급격히 안 좋아졌다. 학교까지는 잘 왔는데 제제의 컨디션이 그 이후 활동을 이어나갈 상태가 아니어서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제제를 데리고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그날 바로 병원을 갈까 싶다가도 어차피 열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았고, 콧물이나 목아픔 같은 다른 증상이 없는 상태라 병원에 가도 따로 처방받을 내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와서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열은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이상 고열로 올라가진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종합감기약을 하나 먹인 다음 일찍 잠에 들었다. 재우면서도 내일 오전까지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병원을 가봐야 되나 고민을 하며 혹시 몰라 학교 앱으로 오전에 늦겠다는 내용의 출석 상황을 신청해 놓았다.
다음 날 아침 8시쯤 되자 제제가 잠에서 깼다. 약간 미열이 있었는데,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굳이 병원에 가지 않고 등교해도 괜찮을 것 같아 천천히 아침을 먹이고 학교로 길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해서는 교실까지 함께 올라가 제제의 상태가 완전하지 않음을 말씀드리고 혹시라도 힘들어하면 연락을 달라고 부탁드렸다.
별일 없겠지 싶었는데 10시 30분쯤 학교 Office에서 연락이 왔다. 제제가 힘들어해서 데리러 올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연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Office옆에 있는 School nurse office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제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약간 배가 아프다고 했었는데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제제는 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가면 간단한 약이라도 처방받을 수 있을까 싶어 학교 바로 옆에 있는 병원을 가보기로 했다. 호주에서는 아이들이 감기 같은 질환이 생기면 General Practitioner이 있는 병원을 찾아 진료를 보면 된다.(이런 의사를 GP라고 부른다) 앱(HotDoc)으로 예약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그냥 Walk-in으로 진료를 볼 수 있는 곳도 있는데 다행히 학교 앞 병원은 그냥 가도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현지 병원은 처음 방문하는 것이라 나 또한 살짝 긴장이 됐다. 들어서서 아이가 아파서 진료를 보러 왔음을 알리고 접수를 하려고 하니 온라인으로 환자 기본 정보를 등록하라고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어렵사리 등록을 마치고 기다리니 내가 접수를 한 담당 의사 선생님이 로비로 나오셔서 우리를 불렀다. 나는 제제를 데리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간단한 질문을 하며, 제제의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우리처럼 청진기로 배를 대보거나 하진 않았다. 다른 증상은 없고 열이 오른 지 하루가 넘었으며 약간 배가 아파한다는 증상을 말씀드리고, 의사 선생님은 중이염은 없는지 아이의 귓속을 살펴보았다. 배가 계속 아프다고 하니 진료실 안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배를 눌러보기도 하면서 어느 부분이 가장 통증이 심한지 물어보았다.
진찰이 끝난 후 의사 선생님은 지금 상태로는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며 일단 열이 계속되면 인근 약국에 들러 해열제를 사서 먹이라고 했는데, 내가 현지 해열제 제품명을 잘 모를까 봐 메모지에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약과 이부프로펜 계열의 약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리고 증상이 심해지면 배를 스캔할 수 있는 인근 센터를 방문할 것을 권하며, 이틀 뒤에도 증상이 심해지면 다시 내원해야 한다는 말로 진료는 끝이 났다.
그렇게 10분쯤 진료를 받았을까, 진료비를 계산하려고 보니 85달러가 청구되었다. (카드로 계산하니 Surcharge 1.01달러가 추가됐다.) 물론, 우리나라 의료수가도 이와 크게 다르진 않을 테지만 막상 내가 계산하는 금액만 비교하자니 너무 큰 차이가 났다. 그래도 제제 학생비자를 신청하면서 현지 의료보험을 들어둔 상태였고, 혹시 몰라 국내에서 해외체류보험을 가입해 두어서 두 군데 모두 보험료를 청구해보려고 한다.
외국에서는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가도 크게 해주는 것이 없이 진료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는데 막상 이렇게 내가 겪어보고 나니 정말 그게 현실이었다. 우리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증상을 살펴보기 쉽고, 열이 나면 각종 피검사나 코검사 등을 통해 어떤 바이러스가 원인인지 알아보기도 한다. 병원 문턱이 낮은 건 정말 단연코 우리나라가 최고인 것 같다. 물론, 너무 항생제를 남용하는 게 때론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외에서 직접 겪어보니 우리나라의 공공 의료 보험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다.
다행히 제제는 병원에 갔다 온 후 열이 완전히 내리고 배가 아픈 증상도 멎었다. 그날까지 나와 집에서 쉬며 체력을 회복하고 밤에는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자기 직전 제제는 나에게, '엄마, 내일 런치오더 시켰는데, 컨디션 좋아져서 다행이다.'라며 안도했다. 내일은 도시락을 안 싸고 처음으로 외부업체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사를 미리 예약해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제제는 내일 해볼 새로운 경험에 설레며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부터 병원에서 진땀 흘리며 아이와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제제를 돌보았더니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정말 외국에서의 삶은 하나하나가 녹록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제제의 열이 잡히고 컨디션이 좋아져서 정말 다행이다.
내일은 도시락을 안 싸줘도 되니 평소보다는 늦게 일어나도 될 것 같다. 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제제 옆에 누워 잠을 청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