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흑과 백, 그리고 양념 치킨의 맛

언어는 달라도 사랑은 통역이 필요 없었다

by 살라킴

그날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완벽한 '흑과 백'이었다.
나는 검은색 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그녀는 눈이 부시게 하얀 반팔 티셔츠에 흰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우리가 섞인다는 건 저런 색깔일까.
​가까이서 마주한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 속보다 훨씬 강렬했다. 작은 얼굴에 꽉 찬 이목구비,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긴 다리. 39년 인생 동안 숱한 사람을 봐왔지만, 내 눈앞에 있는 여자는 확실히 내 '이상형'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평소 주책맞다는 소리를 듣는 내 입이 뇌를 거치지 않고 먼저 반응했다.
​"Wow, You are so beautiful!" (와, 당신 진짜 아름다워!)
​나의 투박한 직구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Thank you, baby."
​우리가 향한 곳은 근사한 파스타 집도, 분위기 좋은 삼겹살 집도 아니었다. 바로 동네 치킨집이었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모로코에서 온 아내는 독실한 무슬림이라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고, 평소에도 고기 누린내에 예민해 닭가슴살만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첫 데이트 테이블에는 붉은 양념 치킨이 놓였다.
​가게 안 남자들의 시선이 우리 테이블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40대를 바라보는 평범한 한국 아저씨와, 눈에 띄게 화려한 외모의 외국인 여성. 그 부조화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시선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훗날 친구들과 간 볼링장에서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겁 없는 20대 청년이 아내에게 번호를 물어보려 했던 적도 있다. 그때 느꼈던 분노와 묘한 승리감이란. '인마, 그 여자가 선택한 사람은 나다.')
​다시 치킨집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기름진 치킨을 뜯으며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호기심은 많았지만 진득하니 끝장을 보는 성격이 못 됐고, 무엇이든 발만 담갔다 빼기 일쑤였다. 하지만 신이 나에게 주신 유일한 재능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부모님께 물려받은 '좋은 눈'과 '비상한 기억력'이었다.
​깊게 파고들진 않았어도 한번 본 것은 사진처럼 찍어내는 기억력 덕분이었을까. 내 머릿속에는 중학교 때 억지로 외웠던 영어 단어들이 꽤 많이 살아남아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통역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띄엄띄엄 서로의 육성을 들으며 대화할 수 있었다.
​"I'm really happy now because we are together." (우리 같이 있어서 나 진짜 행복해.)
​문법이 맞는지 틀린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대답했다.
​"Me too." (나도 그래.)
​그 짧은 두 마디.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번역기조차 필요 없는 완벽한 대화였다.
물론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 엉뚱한 실랑이도 있었다. 그녀는 84년 12월생, 나는 85년 3월생. 한국식 서열(?)대로라면 엄연히 내가 동생이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모로코에서는 3개월 차이는 다 친구야. 우린 동갑(Same age)이야."
​한국이었다면 족보가 꼬인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쿨하게 그녀의 '외국인 마인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우린 오늘부터 친구 먹는 거다.
​치킨 냄새가 고소하게 풍기던 그날,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강한 확신이 들었다. '왠지 이 여자와 결혼해야 할 것만 같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마주 앉은 순간 느껴지는 운명 같은 끌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제안했다.
​"우리 딱 1년만 진지하게 만나보자. 그때도 우리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때 결혼하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과 백처럼 달랐던 우리가, 서로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순간. 그것은 무슬림 여자와 기억력 좋은 남자가 맺은, 인생을 건 1년짜리 약속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