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일곱장의 엽서

카미노 데 산티아고 -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

by 알토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24일째, 536km/775 km. 여기는 폰세바돈이라는 시골 마을. 집이라고 해봐야 열 채도 안되는데 숙소인 알베르게가 4개. 생필품을 파는 가게가 1개다. 해발 1400m. 설악산 대관령휴게소에 마을이 있다고 할까? 마을보다는 민박촌 같다. 잠을 자려는데 열어둔 창문으로 방울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한낮에 산에서 풀을 뜯고, 햇빛을 쬐던 양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고목나무에는 보름달이 걸려있다. 한국에서 며칠 전 보았을 보름달을 이제야 보니 여기서도 추석이 느껴진다. 부산여행 다녀와서 피곤해 잠들었다고 엄마가 말하더구나.. 집이 제일 좋지?

아빠도 처음에 이 길을 나서면서 뭔가 거창한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꿨단다. 이 길은 고행 즉, 힘든 여정이고 아빠가 그동안 저지른 잘못과 불성실을 반성하고, 기도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단다. 힘들지만 앞으로 남은 여정, 불평 없이 걸으려고 한다.

아빠.

길을 떠난 여행자는 감상적이 된다. 해가 지고, 어둠이 길을 가리기 시작하면 가족들이 보고 싶어진다. 게다가 여정의 중간에는 추석이 있었다. 팜플로나를 지나면서 매일 밤 아내와 딸에게 엽서를 썼다. 기념품 파는 곳에서 사진엽서를 사고, 우표는 담배가게에서 팔았다. 스페인의 우체통은 노란색이고 CORREOS, 우체국이라고 쓰여 있다. 빨간색 우체통은 공중전화와 함께 한국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스페인의 작은 시골마을에는 우체통이 마을마다 유채꽃처럼 남아 있었다. 엽서의 시작은 낯 간지럽게도 항상 "사랑하는..."으로 시작됐다. 하루는 아내에게, 하루는 딸에게 썼다. 특별한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 동안 걸은 거리. 얼마나 남았는지. 길이 고되고 힘들다는 하소연과 빨리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에 대한 감상. 부르고스, 레옹 성당의 놀라운 위용과 아름다움. 장남이 가출(?)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보냈을 추석은 어땠는지에 대한 안부.

나중에 가족여행으로 "걷지 말고, 차 타고 " 다시 오자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이 엽서들이 중간에 분실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까?. 처음 쓴 엽서는 열흘이 넘어서야 한국에 도착했다. 매일 한통씩 오는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쓴 엽서가 먼저 도착한 경우도 있었다. 때론 4통이 한꺼번에 배달되기도 했다고 아내는 말했다. 마지막 엽서는 내가 한국에 돌아온 후 한참이 지나서야 배달되었지만, 보낸 날자를 맞춰서 정리해보니 모든 엽서가 무사히 두 대륙을 건너왔다.

손바닥 만한 엽서에 작은 글씨를 쓰다보니 여기저기 맞춤법도 틀리고 띄어쓰기도 엉망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는 제일 먼저 우편함을 열어 봤다고 했다. 우편함이 비어 있는 날이면 그날 저녁 영상통화에서 " 어제 엽서 안 쓰고 잔 거야? " 하고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쓰기가 의무가 되는 순간이었지만 스물 일곱통의 엽서가 8시간의 시차와 수천 킬로를 넘어 가족을 연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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