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 - 아 피레네
이 길을 먼저 간 수많은 순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첫날부터 순례길에서 가장 힘든 구간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산맥을 넘으면 그 이후는 수월 하다고 했다.(한참 나중에 아스트로가를 지나면서 이 말이 그저 립서비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름은 멋있다. 나폴레옹 루트.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기 위해 이 길을 따라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정진홍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를 보면 그는 겨울 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순례길을 나섰다가 죽을 뻔했다고 고백한다. 당연히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길은 폐쇄되지만 여름에도 비가 많이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이 루트는 차단된다고 한다. 다른 길로 돌아갈 것을 순례자들에게 경고하지만 이를 무시한 순례자들 때문에 빈번하게 조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도전정신이 투철한 사람중에 배달의 민족이 많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너무도 청명한 9월의 가을이었고 지도를 보니 가파른 고개도 없어 보였다.
"그 옛날 수많은 군사들이 말 타고, 소 끌고, 대포 밀고 산맥을 넘었을 텐데... 천년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이 고어텍스 등산화도 없이 더 열악한 조건에서도 걸었는데? 힘들까?" 하는 생각을 하며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출발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실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안개가 잔뜩 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오리송까지 8km 정도의 구간은 아스팔트 도로다. 안개가 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드넓은 초원에 양과 소를 방목해서 키우기 때문에 트랙터나 트럭이 올라올 수 있도록 포장을 한 것 같았다.
출발한 지 30분도 안돼 다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어깨가 너무 아프다. 배낭이 너무 무거운 것이다.
어제는 건식 사우나에서 러닝머신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면 비 때문에 습식 사우나로 옮긴 기분이다.
쉬다, 가다를 수 없이 반복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북쪽의 나무들은 나무 중턱까지 이끼가 잔뜩 껴 있었고, 다른 순례자들은 모두 뛰어갔는지 오후가 되니 산길에 아무도 없었다. 이러다가 멧돼지나 늑대, 여우를 만나면 어떻게 하지?... 아니 너무 조용해서 '전쟁 때 죽은 프랑스 군인이나 순례자 귀신이 나오는 거 아니야?'
가끔 오줌을 누다가 머리털이 쭈뼛해지기도 했다.
간신히 해지기 전에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산을 막 내려오니 아내에게 영상통화가 온다. 울고 싶었지만 잘 있다고 썩소를 날리고 숙소 잡고 다시 통화하자고 빨리 끊었다. 첫날 순례 일정이 끝난 것이다. 오늘 일정은 힘들어서 중간에 숙소를 정한 다던가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생장에서 산맥을 넘어 다음 첫 마을이 바로 여기 론세스바예스 한 곳이라 중간에 다치거나, 걷기를 포기해 이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산 위에서 봤던 refuge에서 노숙을 해야 하거나 구조대원을 요청해야 하는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중간에 발을 헛디뎌 다리를 삐거나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혼자 걸으며 수없이 기도 했다. 아무리 배낭 안에 한국에서 가져온 신라면 4개와 누룽지 2팩이 있어도 산에서 노숙을 할 수는 없었다.
살다 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린 것 같고, 힘들지만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가는 길이 오르막인지 내리막 인지? 물어볼 곳도 없다. 힘들어도 도움을 요청할 다른 사람도 없고, 한낮임에도 숲에서 느끼는 섬뜩한 한기를 잊게 해 줄 말벗도 없었다. 그저 무거운 배낭 메고 내 두발과 두 손으로 기어가던, 걸어가던, 뛰어가던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우리는 보통 후회를 하거나 걱정과 푸념을 한다.
“아 괜히 집 떠나서 개고생이네. 해지기 전에 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남은 거야?”
“아 이러다 다리라도 삐면 어떻게 해? 첫날부터 힘든데 어떻게 30일을 더 걸어!”
순례길을 나서기 전에도 이런 후회와 걱정, 푸념에 파 묻혀 살았었다.
“어떻게 올해 목표 채우고 년 마감 하지?” “올 한 해 그럭저럭 마무리해도 내년에는 또 어떻게 해? 해마다 눈은 침침해지고, 체력도 떨어지고, 열정도 점점 희미해지는데! 아 이 지겨운 직장생활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갑자기 늘어난 과중한 업무와 책임감이 힘들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나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혼자 빈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나 혼자 길 위에 누더기 걸치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통했던 몇몇 또래들은 새로운 일터를 찾아서, 아니면 자영업이라는 꿈을 찾아 이미 회사를 떠났고, 회사 밖에 있는 그들에게 아무리 내가 처한 힘든 상황을 실감 나게 설명해도 그들은 내가 느끼는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계인 같았다.
그저 다들 “월급쟁이가 제일 편한 거야! 걍 대충 짤리지 않을 정도만 일하고 참고 다녀 “ “회사 나오면 지옥이야” 이렇게 충고하는 것은 그래도 나았다.
“기대 수명이 늘어서 60살까지 돈 벌어야 돼, 아니지!... 죽을 때까지 일해야 돼!”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네가 맞벌이하니까 돈 벌어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어서 그래, 정신 차려 짜식아!” 이렇게 사정없이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들의 말이니 사실 다 옳다.
그러나 “다리에 쥐 났어” 하고 소리 지르는데 그들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 같은 이 이상한 느낌은 뭐지?
“그래 사는 게 전쟁 이라는데 내가 너무 나태하고, 감상적이라 그런 거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새끼들 먹여 살리려고 평생 동안 일 하셨는데. 정신 차리자! ” 이렇게 결심하고 햄스터처럼 일상의 쳇바퀴를 다시 돌리곤 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수없이 어르고 달래는 일을 몇 년 동안 반복했었다. 즉,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이제는 더 못해먹겠다는 스트레스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어느 5월 봄꽃이 만개한 어느 날 , 마그마가 폭발하듯 서랍 속에 숨겨둔 사직서를 꺼내 들게 된 것이다.
제드 다이아몬드가 지은 <남자의 아름다운 폐경기>를 보면 “남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2번의 계곡을 넘는다. 한 번은 사춘기 한 번은 폐경기”라고 말한다.
생소 하지만 남성 폐경기는 여성의 그것과 유사하게 근력 약화, 만성 피로감, 의욕 상실, 만사 짜증, 성욕감퇴 같은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기도 하고 짧게는 5년, 재수 없게 길어질 경우 자그마치 15년 동안 이런 증상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중년에 접어든 남자들이 갑자기 캠핑 용품을 사들이거나, 스포츠카나 오토바이를 기웃거리거나, 오디오 나 TV 등의 전자제품에 과도한 관심 보이고 지출이 늘어나면서.. 남편 이름으로 수시로 택배가 온다면 폐경기를 의심해 보라고 충고한다.
또한 이런 허무감과 상실감 때문에 갑자기 멀쩡한 남자가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고 한다. 이는 사춘기의 일탈행위 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후 폭풍을 가져와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가정, 평판, 인간관계를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중년기에 줄어든 테스토스테론 때문에 안드로겐과의 균형이 깨졌고, 이 화학적 작용이 나의 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퇴사를 한 것이라는 근거가 희박한 분석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이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기진맥진해서 알베르게를 찾아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마치 우리나라 유스호스텔 수련원과 비슷했다. 1층 공용식당도 꽤 넓고 쾌적했으며, 심지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을 수 있는 레트로 음식이나 탄산음료, 에너지바를 파는 자판기도 있었다. 잘 수 있냐고 물으니 다행히 아직 침대가 남아 있다고 한다. 돈을 내고 등산화와 스틱을 정리하려는데 기다리란다. 여기는 침대가 다 차서 임시 숙소로 가야 한다고 따라오라 하는데 막상 가보니 낡은 이층 철제 침대가 30개 정도 있는 성당의 창고 같은 곳으로 데려간다. 그나마 다 차고 비어 있는 침대라고는 달랑 2-3개다.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다. 성당 하나, 알베르게 하나, 호스텔 두어 개 그리고 그 호스텔에서 운영하는 식당 한 곳이 전부인 이곳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침대가 없었다면 나는 택시를 불러 근처 마을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가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배고프고, 다리, 어깨 아프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흘린 땀 때문에 더운물에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걱정과 근심으로 흘려보내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다리가 아프고, 목적지가 안 보이고, 힘들고 지치더라도 결국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길을 걸으면서 여러번 깨달았다.
넓고 쾌적한 집과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하루의 피로와 땀을 씻어주는 따듯한 샤워, 2차 대전 때부터 사용한 것 같은 낡고 초라한 철제 침대, 알베르게에서 먹은 누룽지와 라면 한 그릇이 때로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치유하는 좋은 약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