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 -생장 피드 포르
산티아고 순례를 위해 출발지인 생장피드포르(이하 줄임, 생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30분경.
아침 일찍 파리 북역 한국인 민박집에서 출발해 TGV를 타고 프랑스 남부 바욘에 도착 다시 생장으로 가는 기차로
바꿔 타기 위해 플랫폼에 내리니 드디어 순례가 시작된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한다.
여기 산티아고 순례길도 성수기가 있는데 지구상의 모든 여행지와 마찬가지로 여름휴가철이라고 한다. 7월, 8월이 되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몰려오는데 한 여름의 무더위가 순례자들을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이른 새벽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숙소를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여름 성수기는 이미 지났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 중순이니 한가하겠지 하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플랫폼에는 유럽인, 북미인, 아시아인, 할아버지, 할머니, 아이, 청년들이 형형색색의 등산복과 등산화 차림으로 꽉 차 있었다.
나야 20년 다닌 회사에 사표 내고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을 이 시간에 한국에서 8000km 떨어진 곳에 와있지만 평일인데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남녀노소 모두 소풍 떠나는 아이들처럼 표정이 밝아 보였다. 아무리 인종과 문화가 다르더라도 불변의 진리는 있다.
출발은 항상 설렘을 주고 심장을 떨리게 한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엄마 품을 벗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스키를 처음 배우고 두려움에 떨며 슬로프를 내려왔을 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받은 첫 월급봉투를 들고 시내 백화점으로 달려갔을 때의 흥분이 느껴졌다.
눈에 익숙한 브랜드의 등산화를 신은 젊은이들 몇 명은 한국말로 대화를 한다. 말을 걸까 말까 하다가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고, 어차피 사람 사귀려고 떠난 여행이 아니기에 일부러 말을 걸지도, 그들이 나누는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 척했다.
나중에 길을 걷다 보니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아보는 주관적인 노하우가 생기게 되었다.
얼굴보다 배낭의 상표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먼저 현지인인 스페인 사람들은 퀸체라는 한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배낭을 많이 메고 다니는데 가격이 아주 착하고 가성비가 우수하다. 순례길에서 수많은 퀸체 배낭을 봤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노스페이스 오리털 패딩이 한때 청소년들 사이에서 국민복이 된 것처럼 거의 국민 배낭 수준이다.
미국인은 오스프리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혼자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곳에 혼자 왔건 아니면 여러 명이 같이 왔건 몰려다니면서 제일 크게 “영어” 로 떠든다. 보통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시끄럽고 어수선하다고 하는데 이 길에는 중화권 방문객이 상대적으로 적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가장 목소리 크고,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건 미국인이 최고였다. 해외 배낭여행이 처음인 나에게 처음 겪으면서도 의아한 일은 “어디서 왔니?” 하고 미국인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자신이 사는 곳의
"주” 또는 “도시”를 말했다.
미국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플로리다, 오하이오, 뉴욕 이런 식으로 말한다. 미국은 워낙 넓은 나라지만 수도인 워싱턴이 동부에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정 반대편 서부, 캐나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주의 이름이 같은 이름의 워싱턴이라는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처음에는 이런 그들의 자기소개가 당황스러웠다.
‘해외에서 만난 이방인이 자기 나라 50개 주, 자기가 떠난 도시의 이름까지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대답하는 건지 아니면 자긍심이 높은 건지? '
나 역시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I’m from 광진구"
매년 순례길을 찾는 해외 방문객 중 랭킹 1위를 차지하는 독일인들은 자국 브랜드인 도이터 배낭을 메는 것 같았다.
순례길을 걸으며 배낭의 상표로 스페인 현지인, 독일인, 미국인을 구별하는 방법은 터득하였으나 아세안을 만나면 그들의 국적을 구분 하기가 여간 어려웠다. 일단 동포들을 알아보기 위해 노스페이스, 블랙야크, 레드페이스, 콜롬비아 등 한국에서 익숙한 브랜드의 배낭을 멘 사람들을 찾아보려 했으나 의외로 이런 제품을 메거나, 신거나, 입거나 한 분들이 별로 없었다.
눈, 코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피면 출신 국가를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들 시커멓게 햇볕에 그을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모두들 비슷해 보였다.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 중에 한국인처럼 보여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중국어나 일본어로 인사하는 대만인, 홍콩인, 일본인들을 많이 만났다. 이런 민망함이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인종에 상관없이 길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게 되면 아무리 ‘한국인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더라도 그냥 “올라” “부엔 카미노”라고 인사했다. 내가 “올라”라고 인사한 사람이 동포였어도 그의 속마음도 나와 똑같았을 것이다.
"저 사람 설마 한국인 아니겠지? 얼굴 봐봐!! 흑인은 아닌 것 같고 말레이시아나 필리핀 사람 인가 봐!! "
플랫폼에서 10여분을 기다리니 생장으로 가는 기차가 도착한다. 도착하는 기차를 보니 좀 실망스럽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경전철도 아닌데 달랑 두량이다.
‘이 많은 사람을 다 태우고 갈 수 있을까?’ ‘노인들도 많으니 덜 늙은 내가 양보하고 다음 기차를 타야 하나? 다음 차는 몇 시간 후에나 있던데…’ 한국에서 습관이 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동안 플랫폼의 사람들이 다 타고도 남는다.
생장까지 한 시간. 단선 철도다. 달리는 기차의 창을 철길 좌우로 빼곡한 나뭇잎들이 때리고 철로 옆을 따라 물이 흐르는데 나무와 계곡의 모양새가 영락없는 설악산 백담사 계곡 같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는 마을 중심가를 한참 벗어나 다시 언덕을 올라 20여분 거리에 있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걸어서 20분 거리인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언덕을 올라가자니 20분이 한 시간 같았다.
여행 막판에 배낭의 무게가 궁금해 숙소에 있는 저울에 배낭을 달아보고 나서야 그동안 얼마나 초인적인 일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가이드 북에 따르면 배낭의 적정 무게는 자기 몸무게의 15-20%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으니 계산하면 아무리 무거워도 14kg 정도다. 그런데 캥거루처럼 작은 배낭을 가슴에 또 한 개 매달고 , 물 1l를 매일 아침 챙겨 걸었으니 무식하게도 거의 20kg에 달하는 배낭을 안고, 메고 다닌 거였다.
출발 하기 한 달 전부터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걷는 훈련을 했었지만 이렇게 배낭을 메고 걸은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훈련은 훈련이고 실전은 전쟁이었다.
별로 덥지도 않은데 머리털에서 발끝까지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사우나 안에 러닝머신을 놔두고 그 위에서 계속 걷는 기분이었다. 계속 지도를 보면서 위치를 확인해도 제자리걸음만 하는 기분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셔츠와 바지가 완전히 땀에 젖어 있었다.
걱정이 또 된다!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떻게 산을 오르고, 길을 걷지?”
역시 마누라와 딸내미는 한국에 놔두고 와도 이 놈의 걱정은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는 영원한 나의 그림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