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 - 갈리시아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의식주일 것이다. 이 세가지만 해결되면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순례길에서도 나는 살아야 했기에 이 기준에 따라 짐을 쌌다.
의 –모자, 속옷 3벌, 겉옷 2벌, 양말 3켤레, 경량 패딩, 우의.
식- 라면 5개, 누룽지 2팩, 깻잎 통조림 2개, 여행용 고추장.
주- 침낭.
그러나 나는 무소유를 실천한 간디나 법정스님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일단 병이 날까봐 걱정되었다. 파스 5장짜리 2팩, 모기약, 위장약, 설사약, 감기약을 챙겼다. 중간에 쉬면서 길에서 깔고 앉아야 되니 일인용 등산매트도 챙기고, 등산스틱, 배낭방수커버, 등산용 컵, 세면도구와 수건, 화장실용 휴지, 물집방지 파우더와 접이식 우산, 운동화, 슬리퍼, 주머니칼, 보조 배터리. 숙소에 짐 풀고 근처를 돌아다니려면 작은 배낭도 필요할 것 같아 챙기고, 핸드폰, 충전기, 일기장, 중간에 심심하면 안 되니 전자책, 카메라를 챙겨 배낭에 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매일 걸어서 이동하고, 어제 잔 곳과 오늘 머무를 곳이 다르니 중간 경유지에서 아무리 탐나는 기념품이나 희귀한 물건을 발견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배낭이 꽉 차서 침낭을 배낭 밑에 매달고 다녀야 했다.
밤마다 “이대로는 못 간다! 버리고 가자” 라고 말하며, 배낭 안에 있는 물건들을 침대 위에 다 쏟아 놓고 정리를 몇 번씩이나 했지만 정작 휴지통으로 들어간 물건은 없었다. 하나씩 챙기면서 배낭에 다시 넣다 보면 다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가족들에게 엽서를 쓰고, 내일의 코스를 미리 검색했다. 처음에는 다음 목적지까지의 거리만 살폈지만 걷다 보니 평지를 20km 걷는 것과 산을 오르내리는 20km는 전혀 달랐다. 아스트로가에서 가이드북의 지도를 살펴보니 앞으로 남은 길들의 오르내림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까지 업고 왔는데 조금만 더 가보자' 생각했는데 '폰 세바 돈', '폰 페라다'를 거쳐 차승원의 스페인 하숙에 등장한 마을, '빌라 프랑카 델 비에르조'에 도착하니 거의 탈진 상태였다. 빈대에 물린 엉덩이는 가렵고, 한라산 오르는 것과 비슷한 산길을 걷기에는 나의 하체가 너무 빈약했다.
알베르게 주인은 그런 나에게 획기적인 서비스를 소개해주었다.
"당나귀 한번 이용해 보세요."
산악자전거를 타고 순례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봤지만 아직까지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당나귀도 빌려 주세요?”
그것은 바로 'Donkey Service '였다.
순례자들의 배낭을 다음 숙박지까지 배송해주는 운송서비스를 '당나귀'라고 불렀다. 아침에 알베르게를 떠나면서 봉투에 주소를 적고, 5유로를 넣은 후 배낭에 붙여 두면 운송업체가 수거하고 다음 목적지까지 배달해 준다. 일단 이름이 너무 낭만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나도 혹시 택배회사 차리면 당나귀 택배라고 지어야지......’
종종 배낭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이런 불행한 경우의 수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여권, 물, 지갑처럼 꼭 필요한 물건만 작은 배낭에 넣고, 업혀 다니던 그놈은 당나귀를 타기 시작했다.
산길이었지만 배낭이 없으니 조금 뻥을 치자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누가 나에게 “너의 순례길은 어땠니?” 하고 묻는다면 “당나귀를 이용하기 전과 후로 나눠진다 “ 고 당당히 대답하고 싶었다.
발걸음이 너무 가볍고, 동네 뒷산에 가벼운 산책을 온 기분이었다. 오르내림이 심한 산길을 걷는 며칠 동안 당나귀를 불렀다.
길에서 쓴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생의 짐을 줄여야 합니다. 그래야 좀 더 편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홀가분해져서 걷다 보니 배낭의 무게가 곧 내 인생의 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덜어내면 수월하게 걸을 수 있는데 왜 그동안 꾸역꾸역 힘든데도 업고 왔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짐이 뭘까? 의무, 책임, 욕망 이런 것들인가?
나에게 인생의 짐은 수많은 잡념과 고민거리였다.
배낭 안에서 화석이 된 누룽지처럼 마음은 늘 정리되지 않고 어수선했다. 당장 닥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고민부터, 한 달 앞, 내년에 일어나지도 않는 일들을 일부러 시뮬레이션해가면서까지 고민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었다.
"고민을 해도 해결이 안 될 일은 고민해도 소용이 없고, 고민 하나 안 하나 해결될 일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된다” 는 말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천이 안 되었다.
잘되고 있으면 안 될 때를 걱정하고, 일이 안되면 안된다고 푸념했다.
걷고, 먹고, 자고 이 세 가지를 반복하면서 그동안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한 수많은 후회, 걱정, 고민을 잠시 동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걷는 동안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서 '빨리 숙소에 들어가서 쉬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걷는데 지쳐 숙소에 들어가면 피곤하니 저녁을 먹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애써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 배우 심혜진 님도 순례길을 걷고 나서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낭의 짐이 인생의 짐 같았다."
그렇게 나도 이 길을 앞서간 다른 순례자들처럼 삶의 교훈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배낭의 무게가 곧 내 인생의 짐의 무게와 같다는 것을...... 배낭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도 빨라지지만 무거운 배낭은 내 어깨를 누르고, 앞으로 가지 못하게 나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과연 내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다음 마을에 숙소가 없으면 어떡해야 하지? 이런 고민들은 길을 걷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리 걱정하고 고민한다고 해서 발걸음이 더 빨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없는 숙소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에 얼마를 걷든 간에 하루의 일과는 결국 끝났다.
끝없이 펼쳐지는 메세타 평원에서 신이 만든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초라함을 느꼈고, 살면서 나에게 달라붙어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된 걱정, 후회, 고민들이 인생의 긴 길을 걷기에는 너무 무거운 배낭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길에서의 깨달음이 영원하면 좋으련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번잡스럽고 심란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어수선해지면 눈을 감고 그 길을 떠올려 본다.
배낭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였듯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걷게 해달라고 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