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ing Home

카미노 데 산티아고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by 알토


32일 동안 스페인 북부 시골길을 따라 별들의 들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나, 드디어 해냈다는 환희 이런 것도 없었다.

그저 앞서 걸었던 다른 날들처럼 피곤하고, 배고프고,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했다. '내가 원래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 그렇겠지. 숙소에 먼저 도착한 다른 순례자들은 아마 기뻐 날뛰면서 지금 파티를 하고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미리 예약해둔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저녁 7시가 넘어 도착했더니 다들 이층 침대의 위아래 한 칸씩을 차지하고 하루의 무거운 피로를 달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식당에서 뭔가 적고 있거나 숙소 앞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기뻐 날뛰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뭔가 화가 난듯한 표정이었다. 화장실이나 샤워실 앞에서 서로 마주쳐도 눈길을 피했다. 길에서 수없이 들었던 ‘올라’라는 인사도 듣기 힘들었다. '마치 강제수용소나 교도소에 들어온 듯한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아직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5km 정도 남아서 그런가? 아니면 다들 여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닌가? 중세시대 땅끝이라고 생각했던 피네스테라를 최종 목적지로 정한, 걷기에 미친 사람들인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구글 지도를 몇 번이나 검색해 봐도 나는 최종 목적지인 Santiago de Compostella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왜 다들 표정이 저렇지?


어쨌든 나는 도착했고 처음 길을 나서면서 계획했던 의식을 치러야 했다. 배낭 안 바닥에 깔려 있던 친숙한 빨간 봉지를 꺼내 알베르게 주방으로 향했다.

한 달 동안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업고 왔던 '라면'을 끓이고, Kenny G 의 Going Home을 들으며 마지막 라면을 먹었다.


생장에서 출발해 피레네를 넘는 날은 비가 왔었다. 그리고 여기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하니 다시 많은 비가 내렸다. 어떤 이들은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일부러 걷는 속도를 늦추거나, 중세시대 땅끝마을이라고 알려진 서쪽 해안 피네스테라를 향해 순례의 여정을 연장하기도 했다. 걸어온 길과 만났던 사람들, 한 달 동안 그 길에서 느끼고 경험한 순간적인 깨달음들이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면 아쉽고 서운했기 때문이다.

보통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그들만의 세리머니가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하거나 더러는 감격에 겨워 울기도 하고 성당 앞 광장에 누워 뿌연 먼지가 내려앉은 등산화 사진을 기념으로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고 시간이 일러서인지 성당 앞 광장에는 우산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단체 관광객들뿐이었다.

대성당은 공사 중이었다. 푸른 비닐 장막과 공사를 위해 세워둔 난간에 가려져 사진을 찍으려고 해도 구도가 나오지 않았고 비에 젖은 대성당은 성지라기보다 을씨년스러운 고성처럼 보였다.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생장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고 적힌 인증서를 받아 들고 성당으로 다시 돌아왔다. 혹시 길에서 마주쳤던 낯익은 얼굴은 없는지 여기저기 둘러보았으나 이상하게도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갈리시아에 들어서면서부터 내가 걸음을 너무 빨리 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뒤로 쳐진 것 같았다. 야고보의 유골이 담겨 있다는 지하무덤을 보고, 수많은 순례객들을 따라 성당 중앙에 있는 야고보상으로 향했다. 회전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면 야고보 상의 어깨를 만질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많은 거리를 걸었고, 군대 간 기간을 제외하면 가장 긴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있었으며, 결혼하고 나서 아내와 딸 없이 떠난 최초의 혼자 여행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동안 어쩌면 시간이 없거나 여유가 없어서 아니면, 체력이 허락하지 않아 이 길을 다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 처음이자 마지막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야고보 상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무사히 건강하게 이 순례를 마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라고산 십자가 아래에 두고온 징표


<걷는 사람 하정우 중에서 >

수많은 소동과 사건 끝에 국토대장정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날, 이상하게도 나는 그저 무기력하고 허무했다. 그냥 그 여정이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정작 왜 나는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보람이나 희열 같은 감정이 따라와야 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드디어 강행군이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쫑파티를 연다 왁자지껄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거기에 끼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랬다간 들뜬 친구들의 분위기를 괜히 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저 지독히 피곤했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뒤풀이를 하던 중 나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졌고, 결국 그 자리에서 도망 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며칠간 꼬박 앓듯이 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길 위에서 일어난 일들이 눈앞에 보였다. 내가 걸었던 길, 동행한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들은 희미해지기는 커녕 쏟아질 듯이 내게 달려들었다.

길 끝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길 위에서 우리가 쌓은 추억과 순간들은 내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일상까지 따라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 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 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나귀와 배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