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초등)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잘 다려진 검은색 교복과 챙 달린 모자를 쓰고 태극기가 날리는 운동장에 모였다. 대열을 맞추라는 체육선생님의 고함 소리에 귀 밑에 솜털이 남아 있는 아이들은 바둑판 위의 검정 돌처럼 줄을 맞춰 입학식을 했다.
3년 후, 교복 대신 남대문시장에서 산 바지와 잠바를 입고 졸업식을 했다. 전두환 정부는 암울한 시대에 걸맞지 않게 일제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중고생에게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게 한 것이다. 남대문 시장 옷가게, 가방가게 사장님들이 교복자율화를 위해 엄청난 로비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저 바람 같은 소리였다.
지금은 학교별로 다양한 디자인의 교복을 입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학교의 교복이 똑같았다. 모자의 교표나 교복에 달린 배지를 유심히 보지 않고는 어느 학교인지 구분이 안됐다. 게다가 뻣뻣한 카라에 달린 학년 표시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유광의 흰색이었고 용감한 일학년이 상급생에게 주먹을 날릴 경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우르르 몰려와 몰매를 때리곤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급생에게 인사를 안 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폭력이 만연한 시대였고, 지금처럼 청와대에 청원도 못했다. 그저 내 탓이오 하면서 불운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동네 인근 고만고만한 형편의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아이들의 때깔이 틀렸다. 여유 있는 아이들은 나이키나 프로스펙스를 신고 있었고 게다가 색깔별로 여러 켤레를 번갈아 가면서 신고 왔다. 비록 내 운동화는 깨끗했지만 메이커가 아니었다. 신으면 너무 가볍고 편하다는 그들의 리뷰도 나를 펌프질 했지만 무엇보다 한 반, 육십 명 중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다섯 명도 안 됐다. 다른 아이들의 시샘 어린 눈빛을 즐기고 싶었고, 무엇보다 잘 사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다. 그 당시 나이키 운동화를 살 돈이면 내가 신고 있는 신발 세 켤레를 살 수 있었는데 삼 남매 모두에게 하나씩 사주기에는 시골에서 고무신 신고 소년기를 보낸 아버지에게 용납이 안 되는 낭비였다.
오랫동안 엄마를 설득했다. 깨끗이 신다가 발이 커지면 동생에게 물려주면 된다고 밤마다 졸라댔다. 그렇게 해서 베이지색에 검정 나이키 로고가 박힌 운동화를 갖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가죽 테니스화가 아니라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지만 영화 속 빌리 엘리엇이 된 것처럼 방 안에서 새 신발을 신어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키를 처음 신고 학교에 간 날 나는 울면서 돌아왔다.
새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신발 빵이라는 야만적인 신고식을 했는데 새 신발을 마구 밟아 더럽히는 것이다. 승리의 여신 나이키를 비메이커 신발들이 달려들어 더럽혔다. 친구들의 신발에 밟히는 발가락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너무 아팠다. 거의 한 달을 졸라서 산 신발이었다. 깨끗하게 다시 빨아 학교에 가니 이제는 헌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그 악동들의 해악은 멈췄지만 나이키와 함께 한 추억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단독주택에 살던 우리 집은 대문을 열어 두는 일이 많았는데 신발장에 넣어둔 신발을 누군가 훔쳐 간 것이다. 아마 요즘 아이들에게 집에 몰래 들어와서 신던 신발을 훔쳐 갔다고 한다면 믿기 힘들어 할 것이다. "식당도 아닌데 어떻게 집에 들어와 신발을 훔쳐 가?" 하고 물어볼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학교 신발장이나 몰래 집에 들어와 메이커 신발을 훔쳐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훔친 신발을 직접 신기도 했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팔기도 했었다. 동생에게 물려주겠다던 나이키는 한 달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동네 신발가게에서 산 페가수스 운동화를 신고 중학교를 마쳤다.
교복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는데 나의 아이는 다시 교복을 입고 입학과 졸업을 맞았다. 교복을 벗고 대학에 들어가니 그동안 옷에 한이 맺혔는지 일주일이 멀다 하고 옷과 액세서리가 택배로 배달된다. 이사 오면서 농 한 칸을 할당해서 줬지만 불과 일 년 만에 나와 아내의 옷장을 잠식하고 옷장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행거를 따로 주문해야만 했다. 안 입는 옷은 재활용하거나, 한 개를 사면 한 개를 버리라고 해도 온라인의 옷이 워낙 다양하고, 저렴하니 버리지는 않고 사기만 한다.
솔직히 나는 온라인으로 옷을 사 본적이 거의 없다. 간단한 셔츠나 내의 같은 것은 사더라도 외출복은 항상 백화점이나 가게에 가서 색상을 보고, 옷감을 만져보고, 몸에 맞는지 입어본다. 거울을 보면서 내 시커먼 얼굴색에 어울리는지, 내가 가진 다른 옷들과 색상의 조화가 되는지 확인하고 지갑을 연다. 저렴한 옷을 여러 벌 사서 자주 바꿔 입는 것보다는 한 벌을 사더라도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사는 편이다.
바지를 사러 갔다가 복숭아뼈가 보이도록 짧게 입어야 한다는 딸과 그건 일시적 유행이니 그냥 입던 대로 길게 입겠다는 나의 입씨름으로 점원 아가씨를 난감하게 한 적도 있었다.
생일을 앞둔 어느 날, 딸아이는 온라인 몰의 핸드백 사진을 보여 주면서 “어떤 게 제일 예뻐?” 하고 묻는다. 부녀간의 대화에는 가끔 번역이 필요하다. “어떤 게 제일 예뻐?”를 번역하면 “어떤 거 사줄 거야?”다.
화면을 스크롤해 보니 분홍색 핸드백이다. 어떤 것은 어깨끈이 금색이고 다른 것은 은색이다. 디자인이 약간씩은 다르지만 내 눈에는 모두 비슷해 보인다.
“다 비슷한데..”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게 어떻게 똑같아? 아빠 색맹이야?” 이건 연분홍, 저건 보랏빛 분홍, 이건 진한 분홍, 이건 로고가 작고, 이건 크고, 이건 어깨끈에 장식이 있고.... 하면서 홈쇼핑의 호스트처럼 분홍색과 핸드백이 생소한 나에게 상세한 설명을 곁 들인다.
내심 눈빛을 보니 프라다 가방이 맘에 드는 눈치다. 그러나 다른 분홍이 들에 비해 가격이 두세배 비쌌다. 아이가 한 명뿐이니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아이들 세명에게 모두 사줘야 하나? 하면서 고민을 안 해도 되니 다행이었다.
“ 그냥 이거 사. 오래 들고 다니면 되잖아”
“ 너무 비싼 것 같은데... 더 고민해 볼게.. “.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지만 어김없이 일주일 후 택배가 왔다. 분홍이 프라다였다.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어깨에 걸치고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보는 아이를 보면서 오래전 잃어버린 나이키 운동화가 생각났다.
이제는 새 핸드백을 메고 나타났다고 해서 일부러 커피를 쏟거나, 끈을 잡아당겨 망가뜨리지도 않을 것이다. 집에 몰래 들어와서 핸드백만 훔쳐 갈 일도 없다.
생활은 전보다 훨씬 윤택해졌고, 살 것들이 넘쳐 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그 황토색 나이키를 처음 신고 기뻐 날뛰던 어린 날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이 들면 사고 싶은 것도 없어진다.
젊은 날에는 소망하는 물건 하나쯤은 <약간> 무리해서 살만하다. 그래야 돈 벌어야겠다는 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