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의원실마다 준비해 온 북과 장구, 꽹과리가 운동장 가장자리에 등장했다. 스탠드 정중앙엔 일찌감치 자리를 선점한 우리 의원실 보좌관과 비서관, 수행비서까지 어깨동무를 나란히 하고는 내 이름과 함께 국적불명의 응원가를 사정없이 불러대고 있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됐다.
백군 청군으로 나뉜 여당, 야당 여비서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가운데 라인을 맞대고 섰다. 팽팽한 기운이 흘렀다.
국회의원회관 소속 보좌진들의 가을 운동회였다.
태어날 때부터 몸치에 나무늘보의 후예였던 나는, 백 미터를 22초에 돌파했고 체력장에서 가장 늦게 결승점에 들어온 이력이 있었다.
그런 내게 강 비서관은 가을운동회에 필히 참석해야 한다고 며칠 전부터 나를 어르고 달랬다.
"안 간다니까요!"
일주일 전부터 공지된 안내문에는 남자는 족구, 여자는 피구로 종목이 정해져 있었고,
공을 무서워하던 나는 겁에 질린 채 공에 맞아 우스꽝스럽게 퇴장하느니 운동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오이수 씨! 의원님도 꼭 나가라 했단 말이요!"
하. 설마 의원님까지 응원을 온단 말인가. 내가 넘어지고 쓰러지는 꼴을 꼭 봐야 한다는 거지.
늦가을이었다.
토요일 일정을 마치고 늦은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나서, 야당 참석진 모두는청색 띠를 머리에 단단히 둘렀다.
국회 새내기 비서였던 나는 몇몇 인사를 나눴던 이들에게 '진짜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빌런이 될까 심히 걱정되니, 내가 폐를 끼치더라도 용서하기 바란다'며 미리 굴을 파놓기도 했고,
그렇게 운동회가 시작됐다.
각 의원실마다 경기를 관람하는 보좌관과 비서관들, 수행비서들까지 스탠드에 앉아 경기 시작도 전에 각방 비서들에게 응원을 퍼부었고 북이나 장구, 꽹과리를 들고 나온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우리 방에선 강비서관이 족구를 내가 피구를 하기로 정해졌고 난 소화 안된 밥이 명치에 꽉 막힌 기분으로 애먼 바닥만 툭툭 찼는데, 그럴 때마다 관람석에선 여지없이 오이수! 파이팅! 하는 멱따는 응원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들과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들을 의식하느라 너무 긴장한 탓에 눈 아랫 살이 덜덜 떨렸다. 나는 공이 무섭단 말이닷.
그래도 위로가 됐던 건 야당 팀에는 옆방 의원님의 비서, 전직 육상선수였다는 175 장신의 날쌘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시끌벅쩍하게 여당야당 할 거 없이 발이 넓어 많은 하객들 사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그녀는,
제법 바람이 불었고 쌀쌀했는데도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다.그때 나는 육상언니가 필요하다고 미리 알려준 벽시계를 선물한 바 있었고 그 친분에 감사하며 그녀 뒤에 납작 숨을 수 있어 기뻤다.
그을린 피부에 탄탄한 종아리를 지닌그녀가 이 경기의 다크호스란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당 백팀은 집중적으로 그녀를 공격했다.
거세가 공이 날아왔는데도, 그녀는 전혀 쫄지않았다. 이를 악물고 던진 상대방의 공을 쉽게 잡아냈고 받자마자 순식간에 상대를 저격했다. 또 간혹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공을 던질 듯 말 듯 밀당하는 그녀의 얼굴표정을 나는 꿀 떨어지게 바라봤다. 게다가 그녀가 가슴으로 공을 받을 때 났던 텅! 소리는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내가 공을 받은 듯통증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 뒤에 숨느라 또 응원단을 의식하느라 이리저리 두더쥐처럼 바닥을 기거나 간발의 차로 공을 피했고,그러다 보니 온몸에 흙이 묻고 팔다리가 저렸고 공한번 잡지 못했는데도 철인경기를 완주한 듯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던 중 기적이 일어났다.
둘러보니 그녀와 나만이 남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상대팀은 한 명 우린 두 명.침이 꼴깍 넘어갔다
관람석에서 파도처럼 환호가 밀려오는 이 어부지리의 현장이 멋쩍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짐짓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는 주목받는 걸, 상당히 싫어하고요리조리 피해만 다니다가 살아남은 터라, 육상언니처럼 멋지지 않았음에도 그저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기뻤다.
그런데 일순 끝까지 피하는 게 상책이었음에도 괜한 욕심을 부려보고 싶은 객기가 치고 올라왔다. 한 번은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다.
마지막이다 싶은 강스파이크가 날아들었다.
나는 육상언니를 밀치고당당히 공을 받았다. 가슴이 아닌 얼굴로.
순간 하얀 별 몇 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콧대가 무너졌나, 아님 얼굴이 찢어졌나.
관람석 어디선가 '오이수 씨! 괜찮소?'라고 큰소리로 내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러다가 갑자기 꽹과리를 치며 '오이수 오이수 괜찮아 괜찮아' 박자를 넣어 막무가내 응원가를 부르는 통에 나는 얼굴을 싸쥐었고,
육상언니는퇴장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불쑥 뜨거운 감정이 올라와 퇴장을 하면서도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나는 후일에서야 그 감정의 실체가 '동지애'라는 걸 알았다. 그 살벌한 현장에서 함께 뛰어준 내게 건넸던 인사. 못난 두더쥐였을지언정, 생사를 함께 해준 동료에게 건네는.
그리곤 육상언니가 던진 마지막공이 상대팀을 맞췄고 우린 이겼다.
월드컵 4강 신화의 현장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보좌진들과 우린 어깨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내 벌건 얼굴은 성공의 부적인양, 사람들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낌없이 받았다. 괜히 취한 기분이 돼,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