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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Nov 03. 2024

영화 <요람을 흔드는 손> 복수의 정석

복수는 그들의 힘

수학에 정석이 있듯, 복수에도 정석이 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꿈꾼다면 이 영화 한 편으로 기승전 완벽한 스토리를 재현할 수 있으리라 장담.

팝콘 무비인 줄 알고 달겨들었다가, 이거 왜 이리 쫀쫀해, 하며 자리를 고쳐 앉아 집중하며 봐야 할 영화.


아님 성탄전야, 최신작들에 신물 난 커플이 있다면 추천. 차곡차곡 쌓이는 의심과 불안이 주는 팽팽한 기운이 연인 간의 결속력을 한층 끌어올려줄 것으로 예상하는 바, 꼭 보시길 바라 마지않는다.




클레어는 둘째를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산부인과 의사 모트에게 진료 중, 성추행을 당한다.

남편인 마이클이 의사를 고소하고, 이후 이와 비슷한 범죄를 당했다는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모트는 몰락한다. 그리고 집에서 자살.


죠를 낳고, 클레어는 마이클과 큰딸 엠마와 함께 꿀 떨어지는 일상을 살아가던 중,

아이를 돌봐줄 베이비시터를 구한다. 그때 나타나는 모트의 아내 페이튼. 그녀는 남편이 자살한 후, 재산이 동결된 데다가 아이까지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고, 단란한 클레어 앞에 '요람을 흔들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클레어의 가정을 파탄낼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는 그녀는, 영리한 사람이다.


그녀가 이 가정을 해체시키기 위해 한 일은 간단하다.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 것.



천사의 얼굴을 한 페이튼은 우선 가장 손쉬운 아기 죠에게 자신의 모유를 먹이기 시작한다. 클레어를 밀어내는 죠.

그리고 첫째 딸 엠마를 괴롭히던 아이를 위협해, 엠마와 비밀을 공유하고


장애가 있는 충실한 일꾼 솔로몬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에 보복으로, 엠마를 추행했다는 혐의를 씌워 쫓아낸다.


또 마이클의 중요한 서류를 훔쳐 클레어의 실책을 유도하는 한편 한밤에 그를 유혹하며, 마이클이 클레어를 밀어내게끔 애를 쓴다.



엠마의 절친 말린이 마이클의 전 애인이었던 단초를 찾아 둘 사이를 이간질하고, 의심이 활활 불타오른 클레어가 자신의 밑바닥을 친구들 앞에 드러내게 만든다. 그러나 부동산업자 말린이 모트의 저택이 매물로 나온 사진 속 모빌이 죠의 모빌과 같다는 걸 의심한 후, 정체를 들키자 클레어의 온실 천창 유리를 이용해 제거해 버린다.


복잡한 소품도 복잡한 관계도 없다.

위태로울 때마다 거칠어지는 클레어의 숨소리, 바람 따라 종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빌, 충직한 솔로몬의 부재, 이런 장치들만으로 시종일관 풍전등화에 놓인 클레어 가족의 상황이 몹시 잘 드러난다. 


솔로몬 쫓겨나고 나서도 클레어 가족을 주시하며 따라다니고, 

절친이면서 현실주의자인 말린의 활약, 페이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마이클의 곧은 심지. 페이튼에게 가스라이팅 됐다고 여긴 꼬마 엠마의 반격, 천식 때문에 페이튼에게 쨉도 안 되는 클레어가 천식을 이용해 가하는 반격, 이 모두가 호흡 한번 끊기지 않고, 관객을 끌고 나간다.



서서히 죠와 엠마를 자신의 아이들이라 믿고, 마이클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페이튼의 망상이 수위가 높아지는 것도 영화의 볼거리다.



차곡차곡 쌓이는 의심과 불안이 서로를 파괴시킬 거라 조바심이 났던 관객은 마지막에 그들의 단단한 가족애를 확인하며, 맘을 놓게 된다. 나는 이제는 이런 해피앤딩이 좋다. 나이가 드니, 현실에서 이미 파괴된 수많은 가정들이 있으니, 영화만이라도 그냥 잘 살게 뒀으면 하는, 그런 순둥 한 양심의 탈을 쓰게 되는 듯하다.

  


이 단단한 시나리오의 복수극이 미래에 나올 수많은 복수혈전들의 고급한 클리셰가 될 거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됐다.


고즈넉한 중산층 마을 베이비시터의 복수라는 진부한 소재가 이토록 세련된 드라마가 된 데에는, La컨피덴셜, 리버와일드, 8마일을 만든 커티스 핸슨의 기량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La컨피덴셜은 시나리오 수업을 할 때마다 텍스트로 봤던 영화이기도 하다.


페이튼의 광기와 클레어의 무기력함이 대립하고, 가스라이팅이 혼재한 속에서 어떻게든 가정을 지켜나가려는 클레어의 투혼이 맞서며, 복수의 제대로 된 정석을 보여준, 요람을 제대로 뒤흔들었던 손에 관한 영화.





나, 연희 엄마 만났다.

진짜? 어디서?

지하철에서. 얼굴을 싹 바꿔서 첨에 누군지 몰랐는데.

근데?

먼저 알은척을 하더라. 세상에.


엄마가 만났다는 그 연희 엄마는,

내가 만난 현실에서 최고라 할만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 이력의 가장 마지막에 내가 붙인 타이틀은, '복수의 화신'이란 다섯 음절이다.


연희는 초2 때 나의 친구였고, 그 이전에 연희엄마는 내 엄마의 동네 친구였다.

고만고만하게 살던 시절, 연희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팝업북을 전집으로 가진 애였다. 연희에겐 위로 두 명의 언니가 있었는데, 셋다 심한 곱슬머리에 눈이 작고 얼굴이 하얀 특징이 있었다.


우린 일 년에 한 번 김밥을 싸 창경원에 소풍을 가는 게 연례행사였고, 이때는 엄마의 동네 절친들과 함께였다. 그중엔 연희 도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연희 아줌마가 제일 키가 크고, 세련된 나팔바지를 입고 있어 요즘 사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늘씬한 서구형 미인이었는데, 아이들 셋은 모두 아빠를 닮아 동네 사람들은 연희와 그 자매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쉬운 듯 혀를 끌끌 찼다.


팝업북에 홀딱 빠진 나는 연희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비굴한 표정을 짓고 서 있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제야 연희는 들고 있던 책을 내게 건네주었다.

"절대로 절대로 찢으면 안 돼!"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크래커를 주렁주렁 매단 지붕이 바닥에서 화라락 집 모양을 갖춘 형태로 변하면, 나는 너무 놀라, 책을 뒤집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나 흔들어 보기도 했었는데. 연희네 집은 그에 반해, 과자는커녕 파리 끈끈이가 천장에 붙어있던 어두운 반지하였다. 이런 비싼 책을 전집으로 가진 연희네가 끈끈이가 달리고 벽 귀퉁이에 곰팡이가 서린  집에서 사는 거 자체가 나는 미스터리했지만, 그 비밀스러움을 좋아했다.


연희는 길을 가다 아는 친구가 보이면, 책을 활짝 펼쳐 보이며 그 앞으로 다가가, 아이들이 '나도 보여줘!'라고 떼를 쓰면 책을 탁! 소리 나게 덮는 그 행위를 즐겼다. 



연희 세 자매는 키차이만 있을 뿐 얼굴이 너무 닮아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 같이 하나의 인형에서 그다음 그다음 인형이 빠져나온 느낌이 들었다. 연희아빠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방에서 집 짓는 일의 오야로 일 한다거나 나이트클럽의 실장이라는 분분한 얘기들이 있었다. 연희 엄마는 가끔 우리 아빠가 없는 날 놀러 와 늦게까지 있다 가기도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연희엄마와 내 엄마 나누는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연희네의 미스터리를 내가 한번 풀어보겠다는 호기심이었을까.


"그 새끼를 먼저 찢어 죽여야 할지, 그년을 먼저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예쁘고 고상한 연희 엄마의 입에선 험한 말들이 날이 선 채 흘러나왔고, 나는 그때 연희가 길에서 탁! 덮기를 즐겼던 그 팝업북을 볼 날이 머지않았다는 불한 기운을 느꼈다. 연희 엄마는 그날 우리 집 안방에 문어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하얀 그녀가 내게는 뱀파이어에게 피를 몽땅 빼앗기고 거죽만 남은 시체처럼 보였고, 그게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녀는 며칠 후, 사라졌다.

연희 세 자매가 학교에 나오지 않아, 담임이 집을 찾아갔고, 아이들은 엄마가 사라졌다며 울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놓고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나, 세 자매는 있는 듯 없는 듯 학교를 다니다가 이사를 갔다.

그 가족의 증발은 내가 언젠가 연희엄마에게서 읽었던 불행의 기운과 맞닿아 있었고, 나는 그 집안에 깃든 그 파리끈끈이처럼 끈적하고 미스터리했던 분위기를 먼저 알아챈 내 자신에 놀랐었던 거 같다. 아무튼 어린 나는 그 가족이 해체된 일보다, 그 입체북을 못 보게 된 일이 못내 서운하고 슬퍼 연희네 집 앞을 서성거던 기억.




엄마는 그러니까 그날 홀연히 증발했던 그 연희 엄마를 만났던 것이었다.

눈과 코와 귓불까지 바뀌었지만 자신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고 했다.

엄마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홀가분한 표정이 돼 내게 숨도 쉬지 않고 그녀의 지난 사정을 속사포처럼 말해주기 시작했다.


딸만 셋 낳은 연희 엄마는, 쥐뿔도 없는 시댁에 미움을 받았다고 했다. 배불뚝이에 그녀에 한참 못 미치는 대갈장군 연희 아빠는 지방을 돌며 일하고 있다 함바식당의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아들을 낳았는데, 연희 엄마는  착한 심성과 딸 셋을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남편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러니까 그날은 아마도 우리 집에 밤늦게 까지 있었던 그날이 아닐까 하는데, 창원에 밤기차를 타고 내려가 연희아빠와 그녀의 집을 급습. 문을 드르륵 열었더니, 여자가 하얀 젖퉁을 드러내고 뽀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했다. 그걸 헤벌죽 바라보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고, 연희엄마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며칠 후 증발해 버린 것이었다.


애가 너무 예쁘더라, 연희엄마가 엄마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고 했다.



연희 엄마는 친정을 비롯해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끊고 증인프로그램에 들어간 듯 사라졌고, 십수 년이 흘러서야, 그녀가 집나가뒤 바로 돈 많은 총각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더라는, 카더라 통신이 들려왔다. 대농장을 가진 180센티의 훤칠한 서른 살의 연하남과 연희 엄마는, 증발한 그 시점 반 년 후바로 결혼을 한 것이었다. 런데 그때  연희 엄마는 큰돈을 들여 얼굴을 대거 성형했다고 전해졌다.

비루했던 날들이여 안녕.

페이스오프 현실판.


새끼, 엿이나 먹어라,

는 심정이었을 테지.


허나 애들을 그 어두운 반지하방에 그냥 남겨놓고 갔을, 그 원한은 깊이가 어떠했을지.


연희는 아직도 엄마를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가 사준 과 엄마의 증발이 그녀 인생에 어떤 우물을 만들었을지,

트료시카 세 자매의 어린 시절의 삶은 그 화려한 책들의 영광까지였구나, 

서툰 부모들의 헛발질이 남긴 상채기.


페이튼의 원한, 연희엄마의 원한. 연희의 원한.

복수는 그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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