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만 하면 뭐든 될 거라 믿었던 순진한 시절. 나는 쿠엔틴타란티노에 미쳐있었다.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은 당시 방구석 루저들에게 한줄기 빛이었다. 이후 펄프픽션과 포룸, 킬빌...... 헤이트풀 8로 이어지는 그의 핏빛 낭자한 병맛액션은 싼마이로 살아가도 당당할 것, 이런 자기 체면에 가까운 말을 방구석 동료들에게 속닥거려 주었다고나 할까.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였다.
독특한 스타일이란 건 죄다 갖다 쓰고, 폭력이란 폭력은 다 들이대고, 스토리라인은 뒤죽박죽이고 주요 인물들의 상태는 온전하지 않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건 화장실 수세미로 닦아도 닦이지 않을 저급한 것들이지만, 그 대사의 맛이 달았다. 또 작중 인물들이 회심하거나 타협하는 순간도 절묘한데, 이 오락가락 뽕 맞은 듯한 감독과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결말이란 게, 대단히 완벽하다. 뻘소리 대잔치마저도.
진지한데 가볍고, 가벼운데 진지한 그의 재간은 그 옛날 마니아층을 만들었고 그들은 이제 중년이 됐다. 우린 나이를 먹고 사회의 중추가 되었지만 그 맘 구석엔, 여전히 싼마이정서를 향유하고 싶은 꿈틀거리는 욕망이 있다.
어느 날 티비에 나온 늙었지만 아직 눈빛이 형형한 쿠엔틴타란티노가살짝 빈정거리는 인터뷰를 했을 때조차, 나는 그가 싫지않았다. 누구 한 명쯤은 철들지 않고 그냥 저렇게 똘끼 충만한 채 살다 가줬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대성공을 거둔 거장의 영화 앞에서도 '그게 뭐가 어쨌다구 난 관심없거든',이처럼 쫄지 않는악동을 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코형제 세스와 리치는 은행 강도다. 은행을 털고 나오며 지도를 구하러 들어간 가게를 또 털고, 가는 데마다 나쁜 짓을 일삼고 마침내, 목사 제이콥 가족까지 인질로 삼아 멕시코국경을 넘어 도주한다.
그리고 '황혼에서 새벽까지'하는 티티트위스터란 술집을 간다. 모든 사달은 이 술집에서 일어난다.
티티트위스터의 출입구 앞엔 먼지 날리는 폭주족들이 바퀴를 하늘로 향한 채 부릉거리고 난리법석이다. 매드맥스의 한 장면 같은 시끄럽고 난잡한 이곳에서 게코형제는 하룻밤을 자고 카를로스를 만나기로 했다. 그곳에서 역시 티격태격 말썽을 일으킨 게코형제에게, 술집 직원들과 손님, 연주하는 사람들, 쇼걸들이 모두 순식간에 뱀파이어로 변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곳 티티트위스터는 외진 곳에 자리잡고서 트럭기사들과 폭주족들을 유인해 잡아잡숫는 뱀파이어 본원이었던 것.
너무 순식간이어서 이 영화의 장르는 대체 무엇? 이러고 있을 새도 없이 뱀파이어가 인간들을 물어뜯기 시작하는데 게코형제와 제이콥가족 섹스머신과 트럭기사 프로스트 외에는 다 제물이 되고 만다. 죽었던 인간들은 다시 살아나 뱀파이어무리에 합류하게 되고, 올드보이 대수의 장도리씬처럼(타란티노가 극찬했다는 장도리) 게코무리가 아무리 잘 싸워도 뱀파이어들에게 쪽수에서 한참을 밀리는 그런 형국.
최고 수위의 슬레셔라 혹시 심장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꼭 한번 봐야겠다 하시는 분들은, 등장인물 자체를 '만화캐릭터'다, 생각하고 보시길 추천드린다.
아내의 죽음 이후 믿음을 잃었던 목사가 뱀파이어들과 혈전을 벌이며 갱생하는 장면에,
수돗물을 성수로 만들어물풍선콘돔으로 사격하거나, 산탄총과 야구방망이를 걸쳐 십자가를 만들고, 술집 손님 섹스머신의 벨트가 열리며 발사되는 성기총이 뱀파이어들을 요격하는 그런 장면들은,
인간이라면 만화적 상상력으로나 한두 번 꺼내봤을 것들인데,이곳에선 체면이고 나발이고 상상 그이상의 모든 것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건 영화니까 흑.
이런 기상천외한 무기들이 등장하기에 앞서 쇼걸의 대표주자 셀마헤이엑이 노란 비단구렁이를 두르고 나타나 동생 리키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너무 관능적이어서 소름이 돋는다. 참고로 동생 리키는 쿠엔틴타란티노. 그의 느끼하고 사패 같은 눈빛과 발페티시를 보라.
점잖은 중년들이 몰래 숨겨놨던 욕망이 햇볕 짱짱한 날 마당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만천하에 다 까발려지는 그런 얄딱구리함의 정수랄까. 그만큼 임팩트가 있었다.
그렇게 물고 물리다가 다 죽어나가고 게코형제의 형 세스(조지클루니)와 목사의 딸 케이트만 살아남는다. 새벽이 지나 햇빛이 들어올 때 나타나 어리벙벙한 현장을 둘러보는 카를로스에게, 나눠줄 돈을 흥정하는 세스(조지클루니).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나는 나쁜 사람이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케이트에게 각자 갈길 가자고 하는 세스.
그 당시 줄거리 따지지 말고 그냥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밌고 몰입도 최강이었다,는게 호불호가 갈리는 이 영화의 공통평이었다. 쓰레기로 보는 부류도 있었지만.
은행털이범의 갱스터영화였다가, 로드무비였다가, 슬레셔장르로 헤까닥 변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는 이 황당무계함을 누군가는(바로 나)엄숙주의와의한판승 같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몇 년 전 나온'늑대사냥'을 보고 나서는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얼마나 쫀쫀한 영화인지를 새삼 알게 됐다.이유없는 유혈낭자는 기분만 잡치고 만다는 사실을 꼭 좀 알았으면 한다.
또 누군가는 포스터만 보고 액션 영화인줄 왔다가, 인생최고의 황당한 영화를 봤다고 고백하며 별점테러를 하기도 했었던, 내 추억의 영화.
마지막 장면, 이들이 떠나가며 비추는 마야신전 또한 의미가 있다. 이 계단식 신전 아래로는 트럭들이 마구잡이로 쌓여있다. 이곳은 아마도 몇천 년 전, 인신공양과 관련된 유적지였을 듯하고, 무리하자면 서구 열강에 대한 뱀파이어들의 복수,라고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마야 문명은 스페인 함대가 들어왔을 때, 이미 그 이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하니, 괜한 뱀파이어들의 오지랖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수학과 천문학의 귀재들이 모였던 그 미스터리한 문명 아래, 이런 병맛 갱스터 호러 무비를 만들어낸 감독 로드리게즈와 시나리오를 쓰고 미친 리키를 연기한 쿠엔틴타란티노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98년 충무로에서 나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영화관들을 드나들었고, 습작 시나리오를 쓰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봉일에 맞춰 명보극장에서 제목부터 스타일리쉬한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봤다.
대낮에 보는 호러물은 자못 쓸쓸했고, 나는 왜 여기에 이러고 있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어둠 속에 있다 나오면 눈이 부셨고 바쁘게 거니는 사람들 사이에 길 잃은 아이처럼 멀뚱히 서 있곤 했는데.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친구를 불러내 낙원상가 지하에서 국수와 소주 한잔을 얻어마시기도 했었다.
두 벌뿐인 청바지와 일 년 내내 같은 운동화를 신었던 나는 충무로에 나갈 때면 전날 청바지를 솔로 빨아 햇볕에 바짝 말려놨다가 오전에 걷어입었다. 나는햇볕을 먹은
빳빳한 바지의 그 거친결이 좋았다.
시간이 남으면 탑골공원에 노인들과 함께 앉아있거나 광화문과 종로를 하릴없이 걸어 다녔고, 세운상가의 복잡한시계방과 공구상가에서 내뿜는 담배연기와 쇠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그리고 해질녘 백팩을 멘 채 지하철을 타면, 그 많은 인파들 사이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굳이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밥은 굶지 않을 거라는 낙관이 있었고, 생각하는 건 다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함이 있었다.
가난마저 내 자양분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간들.
타란티노도 비디오가게 점원이었으니까.
이 오래된 영화를 오늘 다시 봤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고,
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었는데
어랍쇼 그날 극장의 쾌쾌했던 냄새와 혼자 온 관객들,
영화관 앞 리어카에서 팔던 해적판 CD들과 어깨를 치며 걸어갔던 사람들,불콰한 노인들의 탑골공원과 낙원시장의 돼지국밥과 잔치국수, 파르르한 노란백열등까지불과 며칠 전 일처럼 떠올랐고.
충무로역 1번 출구 롯데리아에 낡은 퓨마운동화를 신고 점심으로 때웠던 불갈비버거까지, 머리통에 누가 전기충격을 가한 듯 다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