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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꼴 Dec 01. 2024

가난은 아파트를 타고 내려와

영화 <소름> feat.늦지않아 다행이야

"엄마, 에어컨이 움직여."


새벽에 큰애가 나를 깨웠다.

폭염이었다. 거실에 있는 스탠드에어컨 아래 커다란 모기장을 펴고 네 식구가 여름한철을 나는 중이었다.

모기장을 나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에어컨이 움직이더라고 했다.

나는 잘못 본 라고, 얼른 자라고 했지만 '애는 진짜야!'라고 소리를 질렀고, 울먹이며 '무서워, 무서워'하며 잠이 들었다.


나는 애가 잠 들고나서 긴가민가한 맘으로 핸드폰 플래시를 켠 채 에어컨을 주시했다. 에어컨이 왜 움직여? 말이 돼?


에어컨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불을 껐다. 그리고 조용히 어둠 속에서 에어컨을 노려봤고, 잠이 들려는 찰나, 본능적으로 핸드폰플래시를 다시 켜고 에어컨에 비췄다. 아뿔싸. 에어컨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미세하게. 그리곤 좀 더 좌우로 세게. 그건 에어컨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와는 무관한 소름 끼치는 반동이었다.

대체 에어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혹시 가스 폭발?




영화 소름의 무대인 미금아파트.

504호에 이사 온 용현. 그는 택시기사다. 

그의 취미라고는 이소룡의 철권을 틈나는 대로 흉내 내는 단지 그것뿐.

그는 얼마 전 여자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빈털터리가 된 채 재개발을 앞둔 이곳에 이사를 온 것. 이제 달랑 네 가구만 살고 있고 비 오는 밤엔  귀곡산장 비스무리한데다 강풍이라도 불어오면 훅 날아갈듯한 갈데없는 이들만 남은 그런 아파트.



용현이 이사든 504호는,

30년 전 옆집여자와 바람난 남자가 아내를 죽이고 갓난 애를 버려둔 채 불을 지르고 도망쳤던 그 현장이며, 얼마 전엔 알 수 없는 불이  그곳에 살던 소설가 광태가 죽었던, 저주가 대물림 되는 듯한  불길한 장소기도 한 곳.



510호엔 편의점 알바를 하 골초 선영이 산다. 그녀의 삶은 사방팔방 뻗친 머리털만큼이나  엉망다. 선영은 영화가 시작된 시점부터 끝날 때까지 수히 담배를 피운다. 담배연기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처럼 그녀의 삶은 안갯속에 머물러 있다. 대체 앞이 보이질 않는다. 남편이란 인간은 도박에 빠져 선영을 착취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딱 숨이 붙어있을 만큼만 남겨놓는 인간말종이다. 의 폭력 한복판에 흘러나온 말, '아들도 놓친 년이',에서 알 수 있듯  선영은 아들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용현이 아파트 어딘가에서 끼끼긱하는 이상한 소리를 쫓아간 곳에 선영이 피갑칠을 하고 서 있다. 그녀는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부엌 도마로 때려죽였다. 깊은 밤 시체를 용현과 함께 산자락에 묻는다. 그러면서 둘 사이는 가까워진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내내 비가 내린다.


505호에는 출판사를 운영한 적 있는 소설가가 산다. 출판사가 망하는 바람에 그의 집 책이 가득하다. 그가 용현에게 말한다. 당신이 사는 504호에선, 30년 전 여자가 남편에게 살해당했고 그 시체는 아 발견되지 않았노라고.


그리고  피아노레슨을 하며 사는 선영의 친구 은수. 은수는 504호에 살던 소설가 광태의 여자친구였다. 그녀는 그의 죽음 의문을 갖고 있다. 어느 날 505호 전직 출판사사장 겸 소설가가 광태의 소설노트를 태우고 있는 걸 목격하고는 그가 광태를 죽이고 그의 소설마저 훔쳐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505호 소설가는 광태의 소설대로 미금아파트에 얽힌 저주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베껴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주인집 이발소에 걸린 수십 년 동네를 거쳐간 사람들의 사진들 사이에 걸린 한 장의 가족사진.

이발을 하는 용현에게 이발사(집주인)는 그 사진이, 504호 남자가 아내를 죽이고 불길에 아이를 버리고 떠난 그 가족의 사진이라고 설명을 해준다. 사진을 뚫어져보던 용현은 집에 돌아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화상자국을 바라며, 자신이 그 화마에 버려졌던 30년 전 504호의 그 아이였음을 안다. 아버지란 작자가 다름 아닌 엄마를 죽이고 자신을 불길에 놔뒀으며 옆집여자와 바람나 떠난 장본인이란 걸.



은수는 께름칙한 용현과 가까워진 선영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지만 선영은 그런 은수의 말이 싫다.

은수와 선영의 옥신각신하는 대화를 엿듣게 된 용현은 선영이 실은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이용하려고 했다고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용현의 악의가 발동하고 살인마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난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여자친구에게 배신당한 용현 뒤틀린 심성은 선영마저 자신을 배신할 거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선영의 죽은 아들을 조롱하는 데까지 치닫고, 마침내 떠나온 여행지에서 다툼을 벌이다 선영을 죽인다.


선영은 실은 남편의 극악한 폭력의 현장에서 아이를 구하고자 캐비넷 속에 넣고 문을 닫았은데, 실신한 선영이 뒤늦게 깨어나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아들은 손톱이 뭉개진 채 죽어 있었던 것. 하여 현장을 목격한 목격자이면서 아들의 죽음을 방조한 엄마였던 것.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와 배신했던 여친까지 이미 죽였던 전적이 있는 용현은 빗속에 산자락으로 기어올라가 선영을 매장하 그녀의 지갑 속에서 가족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그 사진 속 남자는 이발소에 걸려있던, 아내를 죽이고 자식마저 유기하려 했던 남자가 아닌가. 선영과 자신은 배다른 남매였단 사실을 이제야 안다.



비 오는 밤.

키우던 햄스터와 짐을 꾸려 미금 아파트를 급하게 떠나는 용현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아파트.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엄마가 불러줬던 자장가 소리가 선득하게 어디선가 들려오고 여기저기 인적 없는 아파트의 복도에 불이 깜빡깜빡 들어오며, 일그러진 용현의 그로데스크 한 얼굴 위로 빗방울이 든다. 이 페인트 벗겨지고 곧 무너질 거 같은 아파트는, 은 엄마의 한이 깃든 거대한 무덤으로 느껴지는데.



이처럼 다들, 각자의 사연이 있다.

곧 무너져 내릴 거 같은 미금아파트는 그들의 가난과 가정 폭력, 살인, 방화등으로 점철된 지옥의 다른 이름인 셈. 이곳 아파트는 실제 서대문에 있던 금화시민아파트다. 공포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집주인들이 반대를 하고 시끄러웠다고 하는데, 이 영화는 이 침침한 아파트가 극의 분위기를 거의 끌고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도를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프다. 부서진 세간살이, 거미줄 낀 자전거, 그을린 벽, 페인트 벗겨진 난간, 쇠냄새 풍기는 방화문.



영화 내내 비가 내리고, 용현의 택시가 오가는 골목과 비 오는 거리는 영화 '택시드라이버'에서 로버트드니로가 창밖으로 노려보고 섰던 그 거리와 매우 닮아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돌아 트래비스가 사회의 악을 처단하겠다며 12살 창녀 아이리스의 포주를 살해한 것과 용현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선영의 남편을 구덩이에 묻어버리는 그 장면이 내게는 묘하게 겹친다.


선영에게 용현의 택시는 가장 안전한 곳이다.

첫인상부터 말끔하고 성실하게 보였던 용현이 비 오는 밤 선영의 남편을 묻으며 그녀에게 드러낸 보호본능은 이제부터 선영과 한배를 탔으며, 그가 선영에게 안착하리라는 희망이 엿보였던 장면이다. 그런데 얼마 후 선영을 오해한 용현이 그녀가 선물한 머플러로 그녀를 쉽게 교살하는 장면에서,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유년시절을 겪은 그가 평생을 그 악의 순환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자기 파괴로 치닫는 그 동기는 '불안'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귀신 없이 귀신을 본 거 같,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서웠던,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잊어버려야 진정한 소름을 느낄 수

있는 몹시 특이한,

인간이 지닌 불안을 아파트란 장소와 빗소리, 두 배우의 표정만으로 압살 한,

저주의 순환고리 안에서 용을 쓰지만 벗어날 길 없는 막막함 때문에 끝을 알 수 없는,

칠갑을 한 연쇄살인이 아닌데도 희망 없는 인물들이 제살 파먹는 그 현장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 고달픔 때문에 내 삶이 함께 무너지고 있는 시감이 드는, 그런 영화. 




2006년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을 때, 그 여파는 주변 신도시까지 이어졌고 버블 세븐이라고 하던 지역 인근에 살았던, 이곳 K시까지 밀어닥쳤다.


오전에 도서관을 가다가 나는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중심가의 한 부동산 앞에 열명남짓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겨울이었고, 영화의 날씨였음에도 아무도 그 줄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부동산 문이 열리자마자 순번대로 앉아 상담을 받고, 이유불문 보지도 않은 채 들은  즉석 복권처럼 아파트를 샀다. 리고...... 그 줄 마지막에 도서관에 연체된 책을 반납하려다 말고 덩달아 줄을 섰던 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음 해 이곳 K시는 가장 먼저 거품이 꺼졌다. 진짜 유령처럼, 동동거렸던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건 저 멀리 이름도 낯선 리브라더스라는 은행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이후였다. 그 미국 은행이 망한 게 우리와 무슨 상관. 그런데 그 해, D단지에서 명이 죽었다. 놀라운 건, 그들이 투신한 그 자리가 같았다는 사실이다. 부동산 사장님은, 그 자리가 나무가 없어 바로 즉사할 수 있는 리라 그랬다고 내게 귀띔을 해줬다.


나비효과라는 영화만 봤지, 이렇게 선명하게 실제적으로 덮치는 파도를 나는 그때 처음 보았고 놀랐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랜 기간 여진이 지속됐다.


아이 을 둔 단지 지인, 그즈음 아파트를 샀고  아파트를 담보로 식당을 운영했는데 이율이 오르고 아파트가격은 떨어지고 불황이 겹치며, 대낮 엘베를 타고 올라가 9층에서 투신을 했다. 녀의 집저층이었는데, 꼭대기층도 아닌 중간층을 누르고 허겁지겁 내렸을 그녀의 그 동선을 나는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쫓고, 매번 어지럼증을 느꼈다.


오후 4시.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동시에 출동을 했고 아파트 앞에서 울린 너무 큰 앰뷸런스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와 누군가 괴성을 지르는 그 현장을 나는 숨죽이고 소리로만 느끼고 있었다. 


미금아파트 504호에서 벌어진 개망나니 아버지의 불륜과 살인행각 이후 버림받은 용현이 벌인  범죄와  아버지가 낳은 이복 남매 선영이 겪은 가정폭력과 아들의 사고사. 이 모든 게 504호에서 벌어진 나비의 날갯짓이 아니던가. 


어쩌면 그녀가 아닌 '나'일 수도 있었던.

심장이 쿵, 실제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오랜동안 내게 악몽이었다.




우리에게 이날이 막차는 아니어야만 했다.

모두 추워서 발을 계속 굴렀고 자못 비장했다. 드디어 부동산 문이 열렸고 순서대로 들어가 촘촘히 의자에 앉는 게 보였다.

줄이 빨리 줄어들길 바랐다. 반드시 내 순번까지 와야만 했다. 긴장해서 배가 꿀렁거렸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 뒤에 누가 서야만 안심이 됐다.


수개월 전 총리가 티비에 나와 아파트를 사지 말라고 담화를 발표했지만 불안은 상쇄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연체된 책을 든 채로 엄마의 노후 자금을 털어 한 채의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보지도 않고 사버렸다. 마트에서 당근 사는 것보다 신속하게 샀다는 안도감 때문에, 집에 가선  소 시켜주지도 않던 킨을  동시에 두 마리나 배달시켜 주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오래된 아파트의 월세 들어갔다. 힘들 때마다 '늦지 않아 다행이야.'란 주문을 외웠고 그러면 온몸의 피로가 싸르르 풀리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사람들은 매물을 갖고 있다는 유명부동산이었던 그곳에 더더 일찍부터 줄을 다. 가격은 그 자리에서 정해졌고 계좌를 받지 못한 매수자가 부동산 집기를 패대기치며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투전판보다 더 역한 냄새가 도시 곳곳에서 올라왔지만, 래도 괜찮았다.


나는 월세 아파트의 낡은 하수도가 역류해 베란다에  묶은 시체냄새가 나도, 변기가 역류해도, 시베리아 웃풍이 들이쳐도 늦지 않아 다행이고, 생각했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기 전까진.)

 



그래서 에어컨덮개를 기습적으로 열자

그곳엔,

 

쥐 두 마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실체를 확인하자

나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고작 쥐을 뿐.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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