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자아로 시작된 정체성 혼란

거짓 자아로 시작된 정체성 혼란


인간은 외모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외적 모습과 겉으로 보이는 성격 자체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내면의 아픔을 숨긴 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의 자아는 태아 때부터 시작해 주로 유년기 때 형성된다. 태아 때부터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고 유년기 때 보호자와 어떤 유대감을 형성하였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정체성은 달라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를 밝혀주며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나머지 타인의 삶을 의식하여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과 확연히 구분된다. 인생의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삶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올바르게 형성되지 못한 자아로 인해 삶의 방향을 어느 곳으로 둘지를 찾지 못한 채 절망의 세계로 빠져든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어떤 정체성을 만들어 갈까?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정체성은 왜 중요한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의 답은 태아의 시절을 기억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태아의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태아 때 겪은 정서적 의식은 간과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인격을 만든다. 인간은 태아 때 부모와 함께한 눈 맞춤, 가벼운 대화, 안김, 적절한 분유, 안정된 토닥거림 등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지녀야 하는 정서적 안정감을 얻는다. 정서적 안정감은 인간 내면의 평온함을 뜻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세상과 부딪칠 원초적인 힘을 얻는다. 자신이 존재감을 표현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얻는다. 정서적 안정감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인간에게 자신만의 힘을 발휘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열쇠인 셈이다.

태아는 엄마의 배 속에서 가장 큰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한 여자가 태아를 품는다는 것은 한 우주를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그 우주를 질서가 있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매우 무질서하고 충돌과 아픔과 분열이 있는 우주로 만들 것인지는 태아 때 결정된다. 인간이 하나의 우주로서 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며 이 세상에서 유일한 공간을 열어가는 것이다. 태아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은 부모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이 있어야만 발휘될 수 있다. 엄마와 아기와 공감은 세상 어떤 관계보다도 강하며 질기다. 그 관계를 통해 아기는 세상을 향한 희망 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우리 내면의 자아는 무엇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이지만 그것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이기에 나와 동행하는 친구 같다. 자아는 내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나는 전혀 친해질 마음이 없지만, 스스로 나에게 다가와 의도치 않은 것을 하도록 요구하는 거머리 같은 녀석이다. 나는 자아로부터 조종을 당하며 성장하지만 자아라는 녀석은 성장하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영원불멸하게 살 것처럼 강력한 에너지를 지녔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의 자아는 어떻게 형성될까? 부모와 헤어진 것에서 절망감, 고독감, 회의감을 그 아이들을 느낄 수 있을까? 부모로부터 거부를 당한 아이는 어떤 자아를 형성할까? 부모에게서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 영적으로 버려진 아이들은 삶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부모에게서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거부된 상처로 애착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서적으로 무감각한 인생을 살게 된다.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아픔에 맞닿아 산다. 세포에까지 새겨진 거부된 상처는 상실, 죄책감, 수치심으로 다가온다. 엄마와 격리되었다는 것은, 즉 유기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사망선고와 같다. 모자간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은 탯줄이 끊어진 태아가 적절한 영양분을 받지 못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아무리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더라도 원초적으로 맺어진 부모와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부모와 분리된 아기들의 울음은 진정한 삶의 상실에 대한 울부짖음일 것이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불가사의하다. 엄마가 없는 아이는 구멍이 뚫린 독처럼 아무리 큰 사랑을 받고 맛난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더라도 다 채워질 수 없다. 애착의 부재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며 안정감을 준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를 세워주는 것이다. 부모와의 애착이 올바르게 형성되지 않는 것은 정서적 의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한마디로 말해 일종의 사망선고라고 할 수 있다. 정서적 의존은 인간에게 행복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적절치 못한 정서적 의존은 기본적인 불신을 비롯한 우울감, 상실감을 유발하며, 그 내면의 상처는 자기애를 말살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생모와의 이별은 아이의 자아존중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모와 헤어지게 되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어떻게 지닐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정은 삶에 필요한 힘을 얻게 해 준다. 최초의 이별을 경험한 아이는 유기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단지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유기로 인해 안정감을 얻지 못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해 거짓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육원생들이 거짓 자아는 어떻게 형성될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인은 자신의 부모를 부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거짓 자아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하는 거짓 행동으로 인해 형성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아이들은 자주 거짓말을 한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는 모습, 행복하지만 행복함을 보이기 않은 모습, 즉 공허함과 외로움에서 시작된 자기표현의 부재는 올바른 감정표현을 저해하여 나 자신을 나답지 않게 만들어 간다.

보육원생들은 거짓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짓 행동을 큰 잘못으로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거짓 행동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으로 판단한다. 보호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가 어렵고 온전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보호자가 자신의 삶에 간섭하는지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자기 판단대로 살아가는 데 왠지 모르게 간섭을 하는 기분이 들고, 어차피 보호자는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다룰 뿐 왜 거짓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왜 했는지를 또는 거짓말을 하게 된 상황을 이해받기는커녕 눈치를 봐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이 아이들을 더 거짓말을 하도록 한다. 자신의 감정을 올바르게 표현할 줄 모르는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앞서 얘기했던 거짓 자아의 형성이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부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보육원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친부모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학교 친구들과 지내다 보면 친구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부모들에 관해 서로 얘기하게 되는데 그럴 때 보육원 아이들은 엄마가 무슨 일을 한다, 아빠가 어디에 계시다고 거짓말을 하며 상황을 모면한다. 보육원에 산다는 것을 공개하면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부모의 존재를 부정한다. 함께 살지도 않는 부모와 함께 산다고 어쩔 수 없이 얘기한다. 숨겨진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 숨긴 과거가 친구들에게 언제 발견될지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긴장하며 지내는 아이들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부모를 부인한 아이들은 어떤 거짓말이라도 못 하겠는가?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며 그들과 올바른 소통을 하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부모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거짓말이요 가장 파렴치한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지만 그 거짓말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고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운명이라는 굴레가 고아들에게 부정적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하여 거짓 자아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아기가 부모에게서 거부당했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며 자신의 일부가 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 깊은 상실감에서 기인한 거짓 자아로 인해 타인과의 소통 능력이 떨어지고, 결별로 인한 트라우마로 심각한 불안장애를 느끼게 된다.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갈망은 체념과 상실감으로 이어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자신만의 유일한 방어기제를 갖게 된다.


이처럼 부모로부터의 분리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은 부모를 상실한 아이들을 더욱 절망케 하고 공허함을 느끼게 하며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한다. 또한 죽음에 이르게 하며, 살아 있지만 현재의 삶이 결코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한다. 즉 살아 있지만 죽은 인격체로서 살아가게 한다. 스스로 무엇을 찾아 해결하기보다는 또다시 찾아올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심리적 퇴행에 이르게 한다. 즉 부모의 유기는 한 인간의 자아를 망칠 뿐 아니라 충격적 상실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내 생일은 정확하지 않다. 부모가 버렸을 때 법원에서 새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생일날이 되어도 큰 감흥은 없다. 어차피 정확한 생일이 아니니 말이다. 또한 만약 정확하더라도 그날은 나를 버린 부모가 생각나는 날이니만큼 큰 감격이 없다. 가짜 생일이지만 그날이 되면 유독 친부모가 생각난다. 왜 나를 버렸는지, 왜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자유지만 그런 생각으로 인해 생일 기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생일이 되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태교를 받으며 생모와 애착형성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꼭 그때로 돌아가 생모의 포근한 품을 느껴보고 싶다.


성인이 되어 나를 버린 친부모를 다 용서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그들에게 왜 나를 버렸는지 따져 보고 싶다. 그들을 저주하기보다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기에 지금까지 나는 내 인생을 두고 절망하기 않고 내 존재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부모의 존재를 모르기에 내 생일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자칫 용기를 잃는 일일 수 있지만, 생일날만큼 내 존재를 더 인정하기 위한 고민은 뒤로 미루는 것이 나에게 더 도움이 되겠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피치 못할 상황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 바에야 아동복지시설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며 주변에서 말을 하지만, 이는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친부모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큰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낳은 부모와 기르는 부모는 엄연히 다르다.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더라도 아이에게 친부모처럼 느껴질 수는 없다. 친부모와의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것이며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고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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